본명은 남헌(南憲). 충청북도 영동에서 한학자 조관구(趙觀九)의 2남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전주공업(全州工業)을 거쳐 일본 도쿄의 전수대학(專修大學)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45년 11월 문예지(文藝誌) ≪혈맥 血脈≫의 동인이 되었다.
1948년 서울중앙방송국에 들어가 방송극 연출 담당이 되었고, 김영수(金永壽)·이백수(李白水) 등을 스승으로 <똘똘이의 모험> 등 많은 작품을 다루면서, 당시의 인기 직업인 성우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해랑(李海浪)·김동원(金東園)·최은희(崔銀姬)·백성희(白星姬)·남해연(南海燕)·이향(李鄕)·박현숙(朴賢淑)·장민호(張民虎)·최무룡(崔戊龍)·민구(閔九) 등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49년한운사(韓雲史)·최무룡·장민호·민구 등과 극단 청막극회(靑幕劇會)를 조직, 그 대표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 직전 명동 시공관에서 프랑스 파뇰(Pagnol,M.)의 <마리우스>를 상연하였고, 부산 피난 때 최요안(崔要安)과 함께 방송국을 지켰다. 수복 후 1956년 3월 미국무성 초청으로 도미, 반년 동안 방송을 공부하고 온 그는 한국 최초로 라디오 연속극 <청실홍실>을 집필, 연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1957년 4월에는 최초의 일일연속극 <산넘어 바다건너>를 써서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 방송극 전성시대를 열었다. 1957년 가을 당시 유일한 민방인 HLKY기독교방송국에서 <수정탑 水晶塔>을 집필하였고, 이어 1958년엔 중앙방송에 <동심초 同心草>, 기독교방송에 <태양의그림자> 등을 발표, 방송극계의 총아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멜로물들이었다. 당시 전란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지칠대로 지치고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데, 세상엔 그들을 달래줄 위안물이 없었다. 소설도, 연극도, 영화도 별로 주목할만한 활동이 없을 때, 그 커다란 공간을 메워준 것이 방송극이었다. 그 뒤 영화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59년에는 신필름에서 <자매의 화원>·<어느 여대생의 고백>을 제작하였다.
한편, 방송극계에 거물들이 속속 나타났다. 김희창(金熙昌)·이서구(李瑞求)·최요안·한운사·임희재(任熙宰)·이경재(李慶裁)·김기팔(金起八)·윤혁민(尹赫民)·정진건(鄭鎭健)·주태익(朱泰益) 등은 장안의 화제를 모으는 마술사들이 되어 라디오·드라마전성시대를 전개해 나갔다.
TV시대로의 전환이 진행되는 동안 그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1963년 TBC(東洋放送)에 <동경나그네>·<언덕위의 하얀집>을, 1964년에는 특집기획 연속극 <일본인>을 썼다. 1965년 오리지날 시나리오 <아빠 아빠 우리 아빠>·<붉은침실>을 쓰고 나서 잠시 쉬었다. 1971년에야 MBC-TV에 연속극 <보라빛 욕망>·<선아의 호수>, 1972년에 <정 情>, 1973년에 <행복>, 1974년에 <기러기>를 집필하였다.
1975년부터는 TBC-TV로 옮겨 <비밀>·<추풍령>·<부부>·<청실홍실>·<욕망>·<사랑도 미움도>를 썼으나, 1980년 KBS에 강제통합되자 집필활동을 중단하였다. 만년에는 거의 미국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