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7월 말 서재필(徐載弼)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이 일본의 육군호산학교(陸軍戶山學校) 교육을 받고 귀국하자 당시 개화파인사들은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이들을 수용하고 신식 군사훈련을 시킬 사관생도 양성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특히 사관생도들이 창덕궁으로 불려가 교련과 체조 등을 시범하여 국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을 계기로 개화파인사들은 사관학교 설립을 적극 간청하였다.
이에 국왕이 호의를 표시함으로써 같은 해 8월 20일 사관학교 설립준비를 위하여 조련국이 설치되고, 사관장(士官長)에 서재필이 임명되었다. 이어 금위영의 화약고를 이속시키고 같은 해 10월에는 조련국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1,500명의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조선군대의 훈련까지 일부 담당하고 있던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압력과 민씨척족의 방해로 개화파인사들이 바라던 사관학교 설립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더욱이, 많은 사관생도들이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로 가담하였다가 체포됨으로써 조련국은 1884년 말 그 기능이 상실되어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