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융진(定戎鎭)의 이속으로 있다가, 1200년(신종 3) 지공거(知貢擧) 임유(任濡) 주관하의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남경사록(南京司錄)에 임명되었다.
아버지가 60세가 넘자 최우(崔瑀)에게 시를 지어 벼슬을 요청하여 최충헌(崔忠獻)의 허락을 받았다. 중서주서(中書注書)·사간(司諫)·기거사인(起居舍人)을 역임하고, 1227년(고종 14)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기거주사관수찬관(起居注史館修撰官)을 겸하여 『명종실록』을 편수한 뒤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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