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0월 3일 전조선 9개도(道) 교화단체연합회(전라북도 · 경상남도 · 평안북도 · 함경남도는 10월 3일 현재 가입 안 됨)와 그에 소속된 7,275개 교화 단체를 망라하는 중앙조직이다.
서울의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결성식을 올렸다. 회장은 정무총감, 부회장은 학무국장 와타나베(渡邊豊日子)와 경성교화단체연합회 부회장 마에다(前田昇)가 되었다. 상무이사에는 총독부 사회과장 엄창섭(嚴昌燮), 이사에는 불교교무원의 김정해(金晶海), 동민회(同民會)의 신석린(申錫麟), 경성보육원의 오긍선(吳兢善), 중앙기독교청년회의 윤치호(尹致昊), 경학원의 정만조(鄭萬朝)와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 조계사(曹谿寺)의 다케오(嶽尾未尙)이며, 정토종개교원(淨土宗開敎院)의 히사케(久家慈光) 등 일본인 8명이 선출되었다.
이 단체의 뿌리는 1930년 11월 7일, 8일 경성부청 회의실에서 열린 ‘전조선 교화사업관계 대표자간담회’에서 찾을 수 있다.
총독 이하 요인과 전조선 교화사업 관계자 300명이 참가했던 간담회로서, 1923년 11월 10일에 발포된 「국민정신 작흥(作興)에 관한 조서(詔書)」의 취지를 철저히 하기 위해, 종래 도훈령(道訓令) 등으로 추진되어 온 민풍함양운동(民風涵養運動)을 획기적인 방향에서 개척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이 간담회에서 또 황도사상과 일본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몇 가지 교화 원칙과, 그것을 수행할 교화단체 연맹기관의 설립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연맹기관’으로 탄생된 것이 각도의 교화단체연합회 및 그 중앙조직인 조선교화단체연합회였다.
1932년 11월 10일, 총독 우가키(宇垣一成)는 정신작흥 · 자력갱생의 전국 농 · 산 · 어촌진흥운동의 시작을 선포하면서, 충군애국(忠君愛國) 등 6개조의 실행 강목을 발표하였다.
또한 경성부는 11월 10∼14일 5일간을 ‘경성부 민풍작흥운동일’로 정하면서 11항목의 「민풍작흥운동강령」을 발표했다.
황도사상과 일본 신앙심을 널리 알리는 데에 그 목적을 둔 정신 작흥 · 민풍함양운동의 실천기관으로 탄생한 ‘교화단체 연맹기관’이 1933년 2월 25일에 결성된 경성교화단체연합회이다.
경성부윤을 회장, 경성연합청년단장 마에다와 경성보육원장 오긍선을 부회장으로, 이강혁(李康爀) · 예종석(芮宗錫) 등 경성 지역 방면위원과 조일종교단체 대표자 21명이 이사로 참가하였다.
이후 같은 해 12월 서울의 교화사업 관계자와 서장 · 학교장 · 정총대(町總代) 및 교화위원 후보자 200여 명이 참석한 ‘경성교화망(京城敎化網)설정간담회’에서 서울 일원은 5개의 교화구(敎化區)로 나누고, 각 교화구 교화위원 합계 207명이 결정된다.
이후 지방 교화단체들이 도 교화단체 연합회에 가맹, 1935년 10월 3일 상위 중앙조직인 조선교화단체연합회를 출현시켰다.
이 시기의 사회교화운동은 충군애국과 경신숭조(敬神崇祖)의 관념을 강조하는 「국민정신 작흥에 관한 조서」를 근거로 하여 전개되었다. 이는 심전 개발(心田開發) · 자력갱생운동과 같은 일종의 관제(官製) 실력 양성운동으로서, 1920년대의 일선융화를 내선일체 · 황민화운동으로 몰고 가는 다리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