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봉(李德鳳)·정태현(鄭台鉉)·박만규(朴萬圭)·장형두(張亨斗)·석주명(石宙明) 등 박물교원(생물학 교사)과 동식물학 전공자가 회합하여 서울에서 조직하였다. 이들은 첫 사업으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동식물전시회를 열어 많은 학생들이 참관하였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연구회원들은 우리말로 통일된 식물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어 식물이름붙이기 연구에 착수하였다. 이덕봉·정태현·도봉섭(都逢涉)·이휘재(李徽載)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이 사업은 2년 만에 2,000여 종의 식물이름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여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으로 펴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식물을 현대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배열하고, 또 우리나라 식물의 표준명을 정한 최초의 일이었다.
조선박물연구회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조선박물학회와는 달리 우리나라 동식물학자들로만 구성된 단체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 연구회는 1945년 광복 후 박물교원연구회 등과 합쳐서 조선생물학회로 새로 출발하게 되었으며, 정부수립 후 다시 한국생물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 식물학회와 동물학회로 나누어져 한국생물과학협회가 총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