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거류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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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20년 5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이 한인들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조직한 자치단체.
단체
설립 시기
1920년 5월
해체 시기
1922년 10월
설립자
이상운|전병희 외
설립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상위 단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일본 총영사관
내용 요약

조선인거류민회는 1920년 5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이 한인들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조직한 자치단체이다. 신한촌(新韓村)에 사무소를 두었으며, 일제가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기관으로 관광단, 음악단을 꾸려 경성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했던 간화회(墾話會)와는 차별성을 가졌다.

목차
정의
1920년 5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이 한인들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조직한 자치단체.
변천 및 현황

1920년 러시아 연해주 ' 4월참변(四月慘變)'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현지 한인마을의 대표들을 소집해 5월 23일 대표의원 총회를 개최하고 조선인거류민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은 이상운(李尙雲), 부회장은 전병희(全秉禧)가 맡았고 집행부 19명이 선출되었다.

신한촌에 사무소를 둔 거류민회의 목적은 교육과 실업을 장려해 친목을 도모하고 문명적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집행부는 지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회비를 1년간 납부한 20세 이상의 남성만이 임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거류민회의 회장은 학무원 · 중재위원 · 재무원 · 서기를 통솔하는 권한이 주어졌으나, 민회의 재정을 감시하는 검사원과 집행부를 감독하는 등의 의사원회를 통해 회장의 권한을 견제하였다.

초기에는 연해주 주1 임시정부의 영향력도 있어 일본과 러시아 양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거류민회는 1921년 1월 23일 「조선인거류민회의 규칙」이 개정되면서 일본 총영사관의 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일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개선한 결과 회장에 조영진(趙永晋), 부회장에 박병일(朴炳一)이 선출되었다. 조영진을 비롯해 윤능효(尹能孝), 채성하(蔡聖河)[蔡成河], 최만학(崔萬學), 강양오(姜良五) 등 전직 항일운동가들이 주요 간부로 참여하여 비록 일제의 회유로 조직되었지만,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한 간화회와는 차별성을 가졌다.

일제는 연해주의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선인거류민회를 이용하였다. 한인들로 관광단, 음악단을 꾸려 경성으로 보내 일본 치적을 홍보하여 참여자들이 친일적 성향을 가지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거류민회는 교육지원 사업, 토지문제 교섭 활동도 하였다.

하지만, 회원 모두가 친일적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독립운동 문서를 넘기거나 독립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일본에 협력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임원도 있었으나, 반일적 행보를 보이는 이들도 존재하였다. 관광단과 음악단 행렬에 끼어 조선으로 가서 반일 활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22년 10월 25일 일본군이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해산되었다. 조영진 등 친일적 인사들은 타도되었고, 반일 인사들에 의해 새로운 주2'가 조직되었다.

참고문헌

논문

송영화, 「1920년 ‘4월참변’ 후 일본의 통제와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역사연구』 37, 역사학연구소, 2019)
박환,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의 조직과 활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 9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주석
주1

제정 러시아에서, 1864년의 개혁으로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중앙 정부의 감독 아래 주(州), 군(郡) 단위로 구성되어 토목, 위생, 교육, 경제 등의 문제를 맡아보다가 러시아 혁명 후 없어졌다.    우리말샘

주2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한인과 러시아 지역의 토착 세력이 중심이 되어, 국권 회복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신문, 잡지 등을 간행하고자 조직한 단체이다.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간하였다.

집필자
윤상원(전북대학교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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