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분권 1책. 연활자본. 1927년 홍순형(洪淳馨)과 민병한(閔丙漢)이 교열, 간행하였다.
선원선계(璿源先系) · 사조고사(四祖故事) · 잠룡시사(潛龍時事) · 고려정란(高麗政亂) · 왕업조기(王業肇基) · 개국정도(開國定都) · 처치제왕씨(處置諸王氏) · 태종정사(太宗定社) · 방간지란(芳幹之亂) · 주필함흥(駐驆咸興)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끝에 부록으로 열성계통보(列聖系統譜)가 있다.
첫머리에는 이성계가 1335년(충숙왕 복위 4) 11월 11일에 태어나서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죽을 때까지 74년 간의 행적이 소상하게 정리되어 있다.
성계라는 이름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용하던 초명이요,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었다. 송헌이라는 호에 대한 숨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성계가 왕이 된 뒤에 이색(李穡)이 부름을 받고 가 임금의 예로 대하지 않고 송헌이라고 호를 부른 일로 독살되었다는 내용이다.
<선원선계>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부터 태조까지 21대를 차례로 기재하고, 이성계가 왕이 되자 추봉한 4대, 즉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 등의 행략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조고사>는 4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환조가 전주에 있을 때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친애하는 기생을 범한 탓으로 산성별감의 모해를 감당할 수 없어 강릉으로 피해 살았는데, 산성별감이 그 소문을 듣고 강릉 지방의 관원을 자청했다는 말을 듣자 다시 함길도 용주리(湧珠里)에 옮겨서 사니 원나라에서 5,000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익조는 준수한 용모와 뛰어난 무용 때문에 그 지방 관리의 미움을 샀는데 여진족과 내통해 모살하려 하자 그곳을 피해 도광리에 살다가 그 관원이 다른 곳으로 전출되자 다시 경흥부(慶興府)에 복귀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도조는 낙산(洛山)의 못에서 서로 싸우던 백룡의 부탁을 받고 흑룡을 쏘아 죽인 일이 있는데, 그 연못의 이름을 사룡연(射龍淵)이라고 한다는 이야기 등도 실려 있다.
<잠룡시사>는 이성계가 어렸을 때 일어난 기이한 일화를 정리한 것이다. 큰 황소의 싸움을 양손으로 뿔을 잡아서 그치게 한 일, 명나라 사신 왕태(汪泰)가 이성계의 인물이 비범함을 보고 장차 임금이 될 것을 예견한 일, 지리산에서 신서(神書)가 발견된 사실, 신인이 금척(金尺)을 준 일, 큰 나무가 말라죽었다가 몇 해 뒤에 태조가 등극하자 다시 소생한 일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이지란(李之蘭)과 황상(黃裳)이 활쏘기를 겨루어 패배를 인정한 일, 이달충(李達衷)이 어린 이성계가 잔을 올리면 서서 읍을 하고 마셨다는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정란>과 <왕업조기>에는 고려조가 요승 신돈(辛旽)의 작란으로 국세가 기울었을 때 이성계가 여진과 원나라의 침략을 격퇴시키고 아기바투(兒只拔都)가 거느린 왜구를 섬멸해 민심을 얻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학(儒學)을 숭상해 유학자인 정몽주(鄭夢周)의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고 손수 그 찬(贊)을 지어 칭찬한 사실,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으로 국권을 장악하고 최영(崔瑩)을 주살한 사실 등이 기술되어 있다.
<주필함흥>은 건국에 공이 큰 방원(芳遠)을 제외하고 방번(芳蕃)을 세자로 세웠다가 왕자의 난을 당하고 정종에게 양위한 뒤 함흥으로 돌아가서 태종이 보내는 사신을 모조리 죽이고 가장 아끼던 박순(朴淳)마저 죽음을 당하자 무학(無學)의 말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온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