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창 ()

근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의정부참찬, 판의금부사,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문보(文甫)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0년(순조 10)
사망 연도
1883년(고종 20)
본관
풍양(豊壤)
정의
조선 후기에, 의정부참찬, 판의금부사,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문보(文甫). 호는 성산(星山). 개명은 조병창(趙秉昌). 아버지는 승지 조민화(趙民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35년(헌종 1)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0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심경택(沈敬澤) 등과 함께 선발되었다.

1847년 전라좌도암행어사 이교영(李敎英)에 의하여 전무장현감 때의 실정(失政)으로 치죄되었다가, 이듬해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왕이 친히 종묘에 봉서(奉書)하였을 때 교리로서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851년(철종 2) 암행어사 이승익(李承益)의 서계에 따라 순천부사로서의 치적이 인정되어 포상, 승서(陞敍)되었고 이듬해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뒤 강화부유수·개성부유수를 거쳐 1859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해 정부에서 이이(李珥)·성혼(成渾) 등 선현의 도덕 학문을 받들어 조가(朝家)가 성현을 숭상하는 뜻을 보이고자 하여, 그들의 사손(祀孫) 중 빈한하여 향화(香火)를 이을 수 없는 자를 각 수령이 이송하도록 하였을 때 이 문제를 담당하는 정경(正卿)으로 대사간 한정교(韓正敎) 등과 함께 발탁되었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역임한 뒤 한성부판윤·대사헌을 지내고, 1863년 예조판서로 임명되어 책보(冊寶)를 올릴 때 제조로 참여하였다. 1863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즉위 후에도 중임을 맡아 1864년(고종 1)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1866년에는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익종대왕옥책문(翼宗大王玉冊文)의 금보전문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을 맡았다. 이해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이어 판의금부사·예문관제학 등을 여러 차례 중임하였다.

참고문헌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집필자
하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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