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삼(汝三), 호는 용은(慵隱)·간죽(看竹). 조남(趙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존성(趙存性)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다. 신익성(申翊聖)의 사위이다.
1634년(인조 12) 성균관유생이 되고, 1640년 창릉참봉(昌陵參奉)을 거친 뒤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의금부도사를 역임하고 임실현감으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올렸다.
164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51년(효종 2)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시폐(時弊), 특히 내수사(內需司)의 모속자(冒屬者) 등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득실에 관하여 상소하였던 바, 그 비판이 적절하다는 칭송이 많았다.
이어 겸춘추관기사관으로서 인조실록청낭청에 임명되었으며, 1652년에는 공산현감·황주판관으로 나갔다가 다시 정언으로 돌아왔다.
이어 병조정랑·지평을 역임하고, 1654년 장령으로 있으면서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였다가 대사헌 이시해(李時楷) 등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병사하니 나라에서 관작을 복구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김제군의 금산사(金山寺)에 있는 소요당대사비(逍遙堂大師碑)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