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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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교
개념
종교와 관련된 사회운동을 가리키는 종교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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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종교와 관련된 사회운동을 가리키는 종교용어.
내용

한국사의 경우에는 19세기 초 이래 전국 규모로 퍼져 나간 민중운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사례는 신라 흥덕왕 때의 속부지술(速富之術)이다.

흥덕왕 때는 신라의 말기적 증상이 뚜렷이 드러나, 특히 호족의 발호에 따른 대토지의 사점화현상(私占化現象)이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농민층의 분해가 극심해지는 가운데 궁민(窮民)들이 무리를 지어 군도(群盜)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들은 주술·종교적인 신앙에 의지하여 일탈적인 활동의 영역을 넓혀 갔다. ‘속부지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절로 형성된 종교운동의 하나인 셈이다.

신라 말기에는 호족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궁예(弓裔)가 895년(진성여왕 5)에 10여 군을 공략하여 세력을 확장한 다음, 898년(효공왕 2)에 송악에 서울을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하였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의 화신이라고 주장했으며, 두 아들을 각각 청광보살(靑光菩薩)·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하였다. 궁예의 후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후백제를 세워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견훤(甄萱)도 미륵불을 참칭(僭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려 4대 임금인 광종 때 이르면 나말여초의 사회적 혼란상이 일단 안정세를 되찾고, 왕권 확립의 기초가 다져지면서 종교운동의 움직임도 볼 수 없게 된다.

다만, 도참설(圖讖說)은 개국 이래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중대관심사로 강조되어 왔는데, 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에도 왕기풍수설(王畿風水說)과 국가비보사찰(國家裨補寺刹)에 대한 조항이 중요 항목으로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인종 때 묘청(妙淸)이 일으킨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도 도참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이처럼 도참사상이 민중의 신념체계 속에 깊이 뿌리 내렸다고는 하지만 대규모의 사회운동으로 번져 간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도 지배층 내의 권력투쟁 성격을 띤 것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정혜결사운동(定慧結社運動)을 통하여 순수한 신앙운동의 열기가 드높았고, 또 몽고나 왜구에 대한 저항의식 속에서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있었으므로 말기적 혼란상이 곧바로 종교운동으로 수렴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체제교학인 유교가 지나치게 정통주의를 고수하는 가운데 점차 노쇠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기층의 민중문화가 종교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는 주자학의 도덕지상주의 노선을 국가 경영의 기본 방침으로 설정하고, 그 밖의 종교적 성향을 음사(淫祀)라 하여 탄압했으며, 노장사상과 불교도 극력 억제하였다.

이런 가운데 송학(宋學)의 체계 중 소자설(邵子說)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서경덕(徐敬德)의 사상이 현실세계와 우주론적 이상향을 통합하는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의 실마리를 열게 되었다.

물론, 송학 중에서 오직 정주학(程朱學)의 체계만을 흡수하여 도덕지상주의의 규범문화를 확립한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성리학에 밀려 지하로 스며들기는 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중종교사상의 도도한 흐름으로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규범문화의 중심권에서 밀려난 식자층이나 잔반세력(殘班勢力) 또는 실지원국(失志怨國)의 유랑 지식층 세력은 신비적인 비의가 담긴 우주론 및 하도낙서(河圖洛書)와 후천개벽설에 탐닉하게 되었고, 급격한 사회변동의 양상에 어울려 ≪정감록 鄭鑑錄≫과 같은 예언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정감록≫은 신비적 운세관을 체계화한 것이며, 문헌상에 나타난 여러 계통의 저작자와는 관계없이 민중 이데올로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런 정감록사상을 모태로 하여 18세기 이래 대소규모의 많은 민중종교운동이 계기적으로 일어난다. ≪인조실록≫에 나오는 ‘초계조입계룡건도(草溪潮入鷄龍建都)’라는 문귀가 현존하는 ≪정감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감록≫과 민중종교운동과의 관계는 조선 중기 이래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민중 세력의 주체성과 기층 문화의 정체성이 한층 고조된 영조·정조 시대에는 ≪정감록≫에 수용된 참위설이나 개벽설·운세설 등이 민중의 이데올로기적 표상으로서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영조·정조 연간에 일어난 각종 반왕조적 변란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오면 노론당(老論黨)에 의한 족벌정치와 서세동점에 따른 서구 세력의 위협, 천주교의 확산 등으로 종말론적인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었고, 삼정(三政)의 문란에 따른 민생의 도탄이 곳곳에서 민란을 유발시키면서 정감록사상은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성진인(鄭姓眞人)이 혁세주(革世主)로서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모티프가 모든 민중종교운동의 중심적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1811년(순조 11) 평안도 가산의 다복동을 근거지로 해서 근 4개월 동안 개성지방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뻗친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중앙의 족벌 세력에 대한 지방 농민들의 자생적인 세력 형성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모아져 왔으나, 그 핵심에는 ≪정감록≫의 ‘정성진인 출현’이라는 상징이 놓여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이후의 농민운동도 마찬가지여서 1862년(철종 13)의 진주민란에 이르기까지 각종 민란들은 참위설이나 개벽설·운세관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 동기를 이해할 수 없다.

1864년 최제우(崔濟愚)에 의한 동학의 창도 역시 정감록사상과 결부된 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한국사에 나타난 민중종교운동의 전형이라 하겠다.

한편,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을 순수한 신앙운동으로 이끌어 가려는 노선을 철저히 고수하여 1893년 보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이후 북접(北接)의 방향을 기초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전봉준(全琫準)을 필두로 한 남접측은 농민 봉기를 선도하여 1894년 갑오농민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현재 이 사건은 전근대적인 신분제사회에서 근대적인 시민사회로 전환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종교운동의 성격을 어느만큼 부여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서로 쟁론을 벌이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접과 북접의 노선 차이에 대하여 성격 규명이 있어야 하며, 갑오농민운동 이후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증산계·단군계 등 각종 종교단체의 신앙활동과 농민전쟁의 상관관계가 파악되어야 한다.

종교운동의 성격을 살펴보면 종교가 다른 문화현상을 지배했던 고대사회에서도 그렇지만, 문화의 각 영역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는 그 성격을 규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순수한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전통사회의 종교운동 성격을 규정 짓는 개념으로는 ① 절박한 궁극적·차세적(此世的)·집단적 구원을 대망하는 민중운동(Yonina Talmon, Norman Cohn), ② 원초적 반항(Eric Hobsbawm), ③ 자문화운동(Nativistic Movement, Ralph Linton)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①은 주로 서구 중세사회의 해체 과정에서 생겨난 프로테스탄트 좌파의 천년왕국운동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 모든 지역에서 종말론적인 지상천국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종교운동의 성격을 일괄해서 규정 짓는 개념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미륵불신앙과 관련된 종교운동이라든지, 후천개벽사상 및 ≪정감록≫에서의 정성진인 출현에 대한 대망,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흥덕왕 때의 속부지술이나 조선 후기의 각종 민란 등은 어느 모로 보든 ②의 성격이 뚜렷하며 ‘도당적 의적(徒黨的義賊, social bandit)’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③의 성격을 띤 것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원본민족주의(proto-nationalism)라고 규정내리기도 한다.

실제로 고려 대몽항쟁 기간에 일어난 여러 민중운동은 대체로 자문화운동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조선 말기의 민중운동에 나타나는 자주의식은 매우 드센 것이어서 왜호(倭胡)에 대한 배타적인 주체의식이 서양 세력에까지 연계되었다.

동학사상은 이러한 자문화의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행동강령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종말론적 천년왕국의 대망이나 원초적인 반항, 그리고 자문화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종교신앙을 표방한 사회운동은 종교운동이라고 규정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동학의 경우, 남접과 북접의 갈등에서 드러나는 문제라든지 갑오농민운동을 종교와 차단시켜서 이해하려는 입장 등의 문제점이 남아 있기는 하다. 남접의 활동을 종교와 분리시키고, 종교적인 요소는 단지 가차(假借)에 불과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진보의 관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보는 전근대적인 주술종교적 사유로부터, 그리고 비합리적 권위의 원천인 전제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럴 때에만 근대의 맹아가 나타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동학의 창도에서부터 갑오농민운동까지의 전체적 과정을 살펴볼 때 원래의 동학과 남접측의 사회혁명 노선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갑오농민운동을 단순히 정치·사회적인 진보운동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심층에 놓여 있는 형이상학적 근거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 규정이 요청되는 것이다.

종교운동이란 근본적으로 역사의 퇴행이나 진보와 같은 성격 규정이 무의미한 영역이다. 그것은 본래 우주론적 질서와 현세의 사회적 질서가 일치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사상의 형이상학적 기반은 ≪정감록≫에 압축된 참위론·개벽설·운세론에 두고 있으며, 송학에서 체계화된 우주론은 그 연원이 되고 있다.

이 우주론은 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최고의 원인자로서 기(氣)를 설정하고, 이를 주재하는 주재자의 역할을 ‘화공(化工)’으로 규정 짓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인간이 우주론적 질서에 순응하면 이상세계의 도래도 성취된다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다. 동학의 주문에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이라고 한 것이라든지, ≪동경대전 東經大全≫에 우주의 생성 변화와 주재로서 한울님을 상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학에서 완결된 우주론적인 구상은 모든 변화를 자연적 질서라고 규정하고, 인간 자체도 여기에 순응하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보았다.

즉, 자연의 질서라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를 수행해 가고 있으며, 그런 과정이 우주에 충만한 기(氣)를 품수(稟受)함으로써 자연질서의 변화에 상응(相應)하면서 스스로의 변화마저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운동은 규범적 평가의 문제가 뒤따른다. 동학을 비롯하여 유사한 성격의 종교운동을 오직 정치적·사회적인 시각에서만 조명하려는 까닭은 일정한 규범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운동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도 역사 사회적인 진보의 맥락에 어떻게 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학자들이 동학의 전체적인 활동상에서 유독 후기의 갑오농민운동이 갖는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부각시켜 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상쇄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바로 이러한 평가 기준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 기준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때 원동학(原東學)과 후기동학 또는 갑오농민운동과의 관계라든지, 후에 계기적으로 발생하는 증산교의 활동, 그리고 단군계와 정감록 계통의 종교활동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은 불가능해진다.

특히, 1920년대까지의 각종 신종교운동은 아무런 의미를 띠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어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운동에 대한 성격 규정은 정치적·사회적 운동에 대한 규정보다도 한층 포괄성을 지녀야 하며, 인간 존재의 궁극성 문제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즉, 단순한 진보나 발전 또는 합리와 이성의 발견이나 보편적 자아의 실현이라고 하는 근대적 가치관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궁극적인 문제, 위대한 법칙성의 우주 속에서 부딪치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문제가 종교운동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물론 가난·질병·고통 등과 같은 현세적 고난의 문제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종교운동은 부득불 사회운동으로서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며, 혁명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나, 정치적·사회적 운동은 어디까지나 종교운동의 내포적 개념이다.

참고문헌

『민중종교운동사』(황선명, 종로서적, 1980)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상·하(변태섭 외, 풀빛, 1981)
『19세기한국전통사회의 변모와 민중의식』(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정석종, 일조각, 1983)
『조선조종교사회사연구』(황선명, 일지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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