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이름 공삼(孔三)은 공자(孔子)와 주자(朱子) 뒤에 자기가 있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모펫(Moffett, S. A.)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비서 겸 어학선생으로 일하면서 장대현교회에 출석하였다. 1909년위창석(韋昌錫)·박영일(朴永一)·김선두(金善斗) 등과 함께 평양 서문밖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1년 8월 한국기독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동행자는 양전백(梁甸伯)·장낙도(張樂道)·최병헌(崔炳憲) 등이었으며, 이 무렵 장·감 연합선교회 결정에 따라 동경한인연합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14년 귀국하여 평양 연화동 교회에 부임하였다. 1920년부터 약 3년간 총회 일을 맡은 뒤로는 무임목사(無任牧師)로 물러났으며, 1935년 평양양로원에 거액을 희사하여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
이 평양양로원은 1907년 평양교회 도제직회에서 설립한 것으로 한국 양로원의 효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광복 후 월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산군에 체포되어 끌려간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 목사이자 기독교 문인으로 널리 알려진 주요한(朱耀翰)이 그의 맏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