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3월 북간도로 망명한 대종교단에 의해 왕청현(汪淸縣)에서 설립되었다. 서일(徐一)이 단장이었으며 백순(白純), 현천묵(玄天默), 박찬익(朴贊翊), 계화(桂和), 김병덕(金秉德)[김성(金星)], 채오(蔡伍), 양현(梁賢), 이홍래(李鴻來) 등 대종교의 간부들이 참여하였다.
무장투쟁을 지향하였으나 무기를 갖출 여력이 없었기에 한인 사회의 역량 강화에 주력하였다. 재만 한인의 실력 양성을 위해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25개에 이르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나 교사로 활동하며 학교를 운영하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6년 대종교 제2대 도사교(都司敎)에 오른 김교헌(金敎獻)이 이듬해 북간도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외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왕청현을 대일 항쟁을 근거지로 삼고 고평(高平)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민복(李敏馥)을 니콜스크-우수리스키에, 백순을 북만주 밀산(密山)에, 진학신(秦學新)을 북만주 소수분(小綏芬)에 파견하여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세력들과 연계하고자 하였다.
백순은 이범윤(李範允)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 국경 지방을 순회하며 의병 모집을 하였다. 1918년 10월 계화는 폭탄 제조인을 고용해 길림(吉林)으로 가기도 하였다. 김성 · 정신(鄭信)을 파리평화회의 대표단으로 파견하였으나, 중도에 귀환하고 말았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대종교인들을 모아 왕청현, 안도현(安圖縣), 연길현(延吉縣)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 · 13 용정(龍井) 만세시위운동 직후에는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대일 항전을 위한 인적 지원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비밀조직 '자유공단(自由公團)'을 결성하고 매월 1인당 1원씩 회비를 징수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5월 대종교단이 대일 항전의 실행 단체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설립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