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언고시로 『연암집(燕巖集)』 권4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에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좌소산인 서유본(徐有本)에게 보내는 형식의 일종의 논문시(論文詩)이다.
박지원은 이 시에서 모방과 창조에 대하여 논하면서 문학이 우리 현실의 것을 다루어야 한다고 내세웠다. 당시의 문인들은 양한(兩漢)의 문장과 성당(盛唐)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그 글을 본받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박지원은 “한·당이 지금 세상 아니니, 풍요도 중국과는 달라야지(漢唐非今世 風謠異諸夏).”라는 구절에서, 풍요는 지금 우리 나라의 현실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1000∼2000년 전 중국의 글투를 모방하지 말라고 하였다.
“‘같다’는 말이 벌써 ‘참’은 아니니, 한·당이 어찌 또 있으랴(曰似已非眞 漢唐豈有且).”라는 구절처럼, 창조가 참다운 문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반고나 사마천이 다시 난다 해도, 예전의 반고·사마천은 결코 안 배우리라(班馬若再起 決不學班馬).”는 구절처럼, 반고나 사마천의 문장은 그 시대 중국의 상황과 작가의 개성이 어울려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자신들도 2000년 뒤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문장을 배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경전의 권위에만 들러붙는 문인들을 비유하여 “육경의 글자를 표절하는 것은 쥐새끼가 사직단에만 달라붙은 꼴일세(點竄六經字 臂如鼠依社).”라고 비난하면서, 인습적인 사고를 거부하였다.
고문파(古文派)와 연문파(軟文派)의 대립이 심해지자, 정권에 참여하고 있던 기성 문인들은 고문을 흉내내지 않는 연암파 문인들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문학 논쟁이 당쟁과 어울려 정조의 문체반정책(文體反正策)까지 나오게 되었다.
세력이 약한 박지원이 결국은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예스럽지 못한 자기 문장에 대해 용서를 빌었지만, 당시의 우리 현실을 다룬 연암파의 문장은 차츰 추종자가 늘어났으며, 문단의 진보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