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소여향 ()

한문학
작품
조선 후기에 박규수(朴珪壽)가 지은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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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박규수(朴珪壽)가 지은 한시.
개설

칠언절구 100수로 『환재집(瓛齋集)』 권2에 실려 있다. 박규수가 23세 때에 조선왕조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찬양하기 위하여 지었다. 박규수 자신의 서문에 의하면, ‘풍소여향’이라는 제목은 『서경』 익직(益稷)편에서 순임금의 태평시절을 노래한 “생(笙)과 용(鏞)을 사이사이에 쓰자 새와 짐승들도 춤을 추었고, 소소(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새도 날아와 법식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라는 구절에서 따다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성 및 형식

당(唐)·송(宋)의 궁사(宮詞)처럼 임금 주위의 일들을 제재로 하여 지었다. 화려한 궁궐이나 궁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풍교정화(風敎政化)의 도움이 되고자 훌륭한 정치와 모범적인 언행들을 노래한 것이다. 가정이나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과 책에서 읽었던 열성고사(列聖故事)들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가송(歌頌)의 형태로 지은 것이다. 100가지 고사를 가려 뽑아서 각기 한 수씩 칠언절구로 읊었다.

내용

본문에서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육룡(六龍)과 태조의 건국과업부터 정조가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지은 일까지, 여러 임금들의 훌륭한 업적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박연(朴堧)의 편경(編磬), 장영실(蔣英實)의 물시계와 흠경각(欽敬閣) 등을 노래하여 세종시대의 문물이 뛰어났음을 노래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을 찾아갔더니 마침 단비가 내려서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이름지었다는 고사를 들어서 형제 사이의 우애가 도타움을 노래하였다. 세종과 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우대하여, 문화발전의 기틀이 닦여진 것도 노래하였다.

『풍소여향』은 조선왕조 창업 이래로 400년 동안 빛나는 치적과 훌륭한 행실들이 이어져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밝힌 것이다. 시마다 주가 붙어 있다. 주는 같은 크기의 활자로 찍혔고, 본문보다도 주가 더 길다. 그러므로 박규수가 주를 원문만큼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에서는 『국조보감』·『문헌비고』·『동국여지승람』·『갱장록(羹墻錄)』 등의 관찬문헌이나 『용재총화』·『해동패림』·『필원잡기』·『오산설림』·『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 등의 사찬문헌들을 출전으로 밝혔다.

의의와 평가

『풍소여향』은 신활자본 문집으로 32장이고 많은 분량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읊은 한권의 영사시(詠史詩)라고 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 이래의 대표적인 왕조서사시이다.

참고문헌

『박규수전집(朴珪壽全集)』(아세아문화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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