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수오(受吾). 호는 뇌봉(雷峯). 시직 지영수(池永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지난(池蘭)이고, 아버지는 생원 지경청(池景淸)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수(璲)의 딸이다. 이춘영(李春英)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생원으로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 유생들이 이에 가담하는 것으로써 벼슬을 얻으려 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 후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저작(著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향리에 머물고 있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를 전주로 배위(陪衛)하며 『분조일기(分朝日記 )』4권을 기록해 올렸다.
뒤에 전적·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예조와 병조의 좌랑, 용강현령, 예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사헌부정언으로 있을 때인 1632년 사친추숭(私親追崇)을 반대한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권도(權濤) 등이 화를 당하자 간언을 임무로 하는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 하여 신구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그 뒤 병조정랑·춘추관기주관·사예·장령·영해부사를 거쳐 1632년 정언에 거용되어 상경하던 도중 박서(朴遾)의 추천으로 충청좌도소모관이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어 모병(募兵)과 모량(募糧)에 힘쓰고, 이듬해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고 하였지만 화의가 성립되어 낙향하였다. 이후 명사와 교유하고 북벌론을 선창하였다. 그의 맑고 깨끗한 절개를 기리고자 송시열이 묘비를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