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릉은 북한 개성특급시 장풍군 지릉리에 있는 고려시대 제19대 명종과 의정왕후 김씨가 묻힌 왕릉이다. 명종은 1202년 승하하여 장단에 묻혔으며 능호는 지릉이다. 의정왕후 김씨와 사후 합장되었다. 지릉은 고읍리 고려 무덤떼 인근에 있었으나 현재는 능역 자체가 훼손되어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지릉의 주검칸에서 청동화폐 3점과 함께 11점의 청자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지릉에서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상감청자는 1255년경 지릉을 수축할 당시에 부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져 13세기 상감청자의 기준작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지릉(智陵)은 몽골의 침략으로 훼손되어 1255년(고종 42) 3월 기미(己未)에 판사천사(判司天事) 안방열(安邦悅)에게 명해 보수하였다. 조선 태조(太祖) 초년에 ‘고려명종지릉(高麗明宗智陵)’이라는 표석(表石)을 세웠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법제화하여 고려의 태조 이하 4위[태조,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 이외의 왕릉은 그 지방의 고을 수령이 해마다 돌보도록 관리 제도를 마련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였고, 1710년(숙종 36)까지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다. 그중 명종 지릉의 경우 능토(陵土)에 수목이 울창하고 병풍석(屛風石)을 비롯한 사면석물이 매몰되어 있었으나, 양호석(羊虎石) 4기와 장군석(將軍石) 3기가 있었다. 이에 현종은 43기 능(陵)에 표석을 세우고 이후 3년마다 1회씩 고려 왕릉의 상태를 간심하여 보고하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고종(高宗) 때에는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지속되었다. 1867년(고종 4) 57기의 고려 왕릉을 봉축하고 표석을 세웠다.
1916년 일본인 학자 이마무시 류[今西龍]가 1867년의 표석을 근거로 고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기록하였다. 1916년에 도굴되어 이것을 수습하고자 조선총독부 기수 세키타니 쵸노스케[關谷長之助]가 현장을 조사하였다. 이후 명종 지릉은 원래대로 복원되지 않은 채 능역(陵域)이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지릉은 구릉이 평지와 접하는 작은 언덕에 정남향으로 위치해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5㎞ 되는 곳에 고읍리 고려 무덤떼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도굴되자 조선총독부에서 긴급 조사를 하였다. 당시 봉분(封墳) 아래쪽을 둘렀던 병풍석은 모두 없어지고 봉토(封土)가 모두 흘러내려 봉분은 높이 180cm, 지름 630cm 정도였다. 봉분 앞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홀을 든 문인석(文人石) 1쌍이 마주 서 있었는데, 문인석의 높이는 150㎝, 너비는 60㎝였다.
주검칸[玄室]은 서쪽으로 15도 치우친 남향에 외칸의 돌방무덤이고, 돌방의 크기는 동서 길이 288㎝, 남북 길이 360㎝, 높이 213㎝이다. 돌방의 구조는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네 벽을 쌓고 판석으로 천장을 덮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다. 천장은 3매판석(三枚板石)을 써서 덮고 있는 상형석실(箱形石室)로 되어 있으며, 전부터 천장석까지의 높이는 2m를 약간 넘는다. 석실에는 연도(羨道)가 없으나 남벽(南壁)에는 좁은 문의석(門倚石)이 각 1개씩 세워져 있고, 중앙에는 밖에서 맞추어 넣은 넓은 문비석(門扉石)이 있다. 그리고 석실 내면은 벽과 천장 전면에 회칠을 하고, 천장은 청색과 주색으로 성신도(星辰圖)를 그린 흔적이 있으나 네 벽은 공백으로 남겨 두었다. 벽 상부에 못이 돌려 있으며 사신(四神)을 그린 휘장을 둘러쳤던 것 같다.
무덤 칸 바닥 중앙에는 1변 30㎝의 방형 전(塼)이 깔려 있고, 중앙의 관대(棺臺)는 길이 272㎝, 너비 118㎝, 높이 20㎝이다. 명종과 의정왕후(義靜王后)가 합장되었다고 하는데 관대가 하나뿐인 단장용(單葬用)이다. 주검칸에서는 껴묻거리로 청자 계통의 발(鉢) 1개, 접시[皿] 6개, 금동고리(金銅環), 동전(銅錢) 3개가 출토되었다. 동전은 매몰토 속에서 수습되었는데, 화폐는 황송통보(皇宋通寶, 1039년), 개원통보(開元通寶, 713-742), 천성통보(天聖通寶, 1022-1031) 3점이다. 특히 1202년 지릉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자상감여지문완(靑磁象嵌荔枝文碗)’의 경우 높이 8.4㎝, 입지름 20.3㎝의 크기이다. 이 유물을 통해 상감청자(象嵌靑磁)는 무신란(武臣亂)이 일어난 1170년 이후에 발생하여 명종 연간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고 보는 등 도자기의 역사 연구에 획기적인 유물이다.
명종 지릉은 명종이 최충헌의 난이 일어나 폐위된 뒤 3년 뒤에 기존 고려 왕릉에서 벗어난 장단면에 조성된 유일한 사례이다. 조선시대 현종 대에 현장을 조사하여 석수(石獸)와 장군석이 세워져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주목을 받았다. 1867년의 표석에 의해 1916년 조사된 이후 도굴당한 뒤 원래대로 복원되지 않아 왕릉의 원형을 잃었다. 하지만 명종 지릉에 부장(副葬)되었다가 도굴되어 수습된 ‘청자상감여지문완’은 1202년이라는 청자의 하한 연대를 제공함으로써 상감청자의 발생 시기를 1170년 무신난 이후로 올리면서 명종 대에 발전하여 13세기 초에 절정기를 이룬다는 도자사 연구에 핵심적인 유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