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는 알 수 없으며, 풍채가 뛰어나고 일찍부터 불도(佛道)에 뜻을 두었다. 어느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포교활동에 종사하였으며, 703년(성덕왕 2)에 지란(智鸞)·지웅(智雄)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서 복양(濮陽)의 지주대사(智周大師)로부터 법상종(法相宗)의 교법(敎法)을 이어받았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가서 원흥사(元興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유식론(唯識論)』 등을 강론하여 이름을 널리 떨쳤다. 706년 10월 16일에 우복야(右僕射) 등담해공(藤淡海公)이 관직에서 물러나서 유마회(維摩會)를 베풀 때 그를 강사로 초청하였다.
그의 강의는 말과 뜻이 맑고 깊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감복하게 하였다. 그 뒤 다시 법문의 해설을 청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주 법회를 열게 되었는데 언제나 강석이 가득찼다고 한다. 그의 법은 용문사(龍門寺)의 의연(義淵)이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