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김씨(金氏). 법호는 교각(喬覺). 신라의 왕손으로, 24세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교각과 동시대 사람인 당대(唐代)의 비관경(費冠卿)은 813년(헌덕왕 5)에 쓴 ≪구화산화성사기 九華山化城寺記≫에서 8세기 초에 승려 지장(地臟)이 있었는데 그는 김교각이라는 신라의 왕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 때 그는 볍씨를 가지고 삽살개 한 마리와 함께 돛단배를 타고 건너와 중국 안휘성(安徽省) 지역에 벼농사 짓는 법을 전파한 뒤 수행을 계속하다가 99세로 입적하였으며, 공덕이 높아 문하에 제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당에 간 연대에 대해서는 653년 입당설, 719년 입당설, 756년 입당설 등 세 가지가 있다.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인 비관경의 ≪구화산화성사기≫와 이용(李庸)이 편찬한 ≪구화산지 九華山志≫에 의하면 719년(唐 開元 7) 24세 때 입당한 것이 유력하다.
그는 입당한 뒤 바로 구화산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각지를 돌아다니다 구화산으로 들어갔다. 즉 ≪신성전 神聖傳≫에 김교각이 “바다 건너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지양(池陽: 지금의 靑陽縣)구자산(九子山, 즉 구화산)의 풍경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산마루에다 거처를 잡았다.”라고 하였다.
김교각은 불도를 닦으려 처음으로 구화산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절벽을 오른 후 자그마한 석굴(지금의 동암동)에 거처를 정하고 그날부터 불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757년 구화산 기슭에 사는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구화산에 올라갔다가 석굴 속에서 도를 닦는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를 도와주었다. 그 때부터 김교각은 자주 산 밑에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였다.
이 때 구화산 일대에서 큰 부자였던 민양화(閔讓和)와 그의 아들 도명(道明)이 그의 설교에 감화되어 구화산을 불교성지로 하고 백성들을 모아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이 후에 화성사(化城寺)가 되었다.
이 때부터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중국 각지는 물론 신라에까지 전해져 신라인들도 구화산을 찾아와서 불문에 들어섰다. 김교각은 ≪화엄경≫을 연구한 기초 위에 새로 4부의 불경을 편찬하여 구화산에 두고 설교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불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서역에 가서 불법을 연구하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구화산에서 자신의 독특한 불교이론을 내놓고 구화산을 성지로 만들었다. 794년 갑자기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참선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때 산이 울고 돌이 떨어지며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새들이 비통하게 울었다고 한다.
시신을 석함 속에 안치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보니, 얼굴은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손이 부드럽고 뼈마디에 소리가 나며 마치 금쇠를 흔드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유신을 석탑 안에 옮겨놓고, 육신전(肉身殿)을 건립하여 석탑을 보호하였다. 열반에 든 이후, 불교도들은 ≪대승대집지장십륜경 大乘大集地藏十輪經≫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그를 바로 지장보살의 현신이라 믿게 되어 김지장(金地藏)이라 하였다.
이는 ≪대지도론 大智度論≫에서 말하고 있는 육신(肉身)의 보살이 법신(法身)의 보살로 화한 것임을 뜻한다. 이때부터 구화산은 지장도량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삭발형의 지장보살이 아닌, 머리에 관을 쓴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신앙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김지장상의 양식은 머리에 관을 쓰고, 신라에서 데리고 갔다는 개의 형상을 한 동물상을 대좌로 좌상을 취하고 있다.
머리의 보관은 5불을 나타내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 그 왼쪽에 보생불(寶生佛)과 아촉불(阿閦佛),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과 성취불(成就佛)을 입불로 나타내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김교각이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즉 그는 중국 4대불교 성지의 하나인 구화산 성지의 창시자이며, 또한 ≪화엄경≫의 기초 위에 4부경을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불교이론을 정립하였다.
이것은 중국불교이론의 발전을 촉진한 것이다. 또한 그는 구화산에 있는 동안 많은 시(詩)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이것은 당나라 시집에도 수록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 신라에서 황립도(黃粒稻)란 벼종자를 가져오기도 한 그는 승려들을 동원하여 벼농사를 지었으며, 뽕나무를 심기도 하였고, 서역에서 가져온 오서송(五敍松), 운무향차(雲霧香茶) 등도 구화산에 심어 구화산의 특산품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당나라 불교문화의 발전 뿐만 아니라 농업경제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으며 한·중경제문화교류에도 공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육신의 보살이 법신의 보살로 화한 실례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