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가좌동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돌덧널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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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돌덧널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일제강점기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 처음으로 파악된 이래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이나 「가야문화권유적정밀조사보고(伽倻文化圈遺蹟精密調査報告)」 등에 계속해서 채록되었다. 1988년 9월경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고분군 내의 극히 일부분인 4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내용

봉분은 평면 원형으로 외형상 남아 있는 것과 유실되어 전혀 없는 것도 많다. 발굴조사된 제1호분은 주위의 소형 석곽분(小形石槨墳)인 제2·3·4호분과 더불어 일종의 다곽분(多槨墳)일 가능성이 높다. 모두 세장방형(細長方形)의 수혈식석곽분이다.

측벽은 사람머리 크기의 할석을 이용해 측벽을 축조하였다. 개석은 제1호분에만 남아 있는데 인공이 가해진 커다란 할석과 판석을 섞어서 정연하게 덮었다.

석곽의 바닥에는 관대(棺臺)나 시상(屍床)과 같은 특별한 시설물은 없었으며 생토층을 정지하고 그 위에 부드러운 흙을 한 벌 깐 뒤 목관을 안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규모가 큰 1호분의 봉분은 지름 9∼10m, 높이 1.5m 정도이고, 석곽은 길이 4.9m, 너비 0.9m, 깊이가 1m이다. 이보다 작은 2호분의 석곽은 길이 3m, 너비 0.5m, 깊이 0.5m이다.

유물은 3호분을 제외하고 모든 유구에서 출토되었으며 부장위치는 시신의 머리와 발치의 양쪽이었다. 토기 26점, 철기 19점, 귀걸이 1짝, 토제 구슬로 된 목걸이 1벌, 방추차 2점 등 모두 49점이 출토되었다. 규모가 가장 큰 제1호분에 많은 토기와 철기가 집중적으로 부장되는 특징이 확인되었다.

토기는 고배(高杯)·단경호(短頸壺)·장경호(長頸壺)·기대(器臺)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 두 점을 제외하고 모두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서 가야 후기에 속하는 유적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적인 것들이다.

특히, 고루 출토된 고배는 형태와 경도에서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유구의 중복현상과 함께 고려해볼 때, 각 자료는 시간의 추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철기는 화살촉과 도끼 등의 무기류와 아울러 마구로는 재갈만이 발견되었다. 많고 다양한 것은 아니지만 유독 이들 철기가 규모가 가장 큰 제1호분에서만 출토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의와 평가

가좌동고분군 속에서 발굴조사된 여러 기의 고분은 대략 6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해당되는, 즉 가야 후기 진주지역에 존재했던 어떤 가야집단이 가졌던 문화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나아가 서부 경상남도지역의 가야 후기의 문화와 역사를 규명하는데 유익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문화재관리국,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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