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경상대학교 박물관의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 뒤, 진주∼광양간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 부지에 포함되어 1989년에 조사되었다. 현재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대부분 소멸되었다. 확인된 유구는 19기의 가야시대 돌덧널무덤[石槨墓]와 1기의 조선 후기 옹기가마이다.
가야시대의 돌덧널무덤은 대부분 판석상(板石狀)의 할석(割石)을 이용한 석관계 돌덧널무덤들로서 규모가 대단히 작다. 그러나 다2호분은 평면형태나 측벽의 축조방식에서 전형적인 가야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와는 판이한 것으로서 앞트기식[橫口式] 또는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토기 21점, 철기 10점, 구슬 78점으로 모두 109점이다. 토기는 호류(壺類)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밖에 굽다리접시[高杯]·개배(蓋杯)·컵형토기(cup形土器)·연질옹(軟質甕)·귀때단지 등이 발견되었다. 철기는 부(斧)·겸(鎌)·촉(鏃)·도자(刀子)·꺾쇠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자료는 다른 가야고분 출토유물에 비하면 박장(薄葬)이라 해도 좋을 만큼 빈약하다. 반면에 구슬은 대단히 많이 부장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유물과 돌덧널의 규모를 통해볼 때, 대략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형성된 가야시대의 피지배층들의 매장 유적임을 알 수 있다. 하동지역의 늦은 시기 가야문화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1기의 옹기가마에 대한 조사는 우리나라의 역사고고학적 조사가 부진한 상황에서 조선 후기 선조들의 생활의 일단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쉽게도 비교고찰에 의한 이 가마 유적의 성격과 연대를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유적지 곳곳에서 옹기들과 함께 발견된 백자편(白磁片)을 통해볼 때, 이 유적은 대략 17세기 이후, 즉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