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남산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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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 · 도랑 · 고인돌군 관련 복합유적. 시도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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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 · 도랑 · 고인돌군 관련 복합유적. 시도기념물.
내용

1997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특히, 청동기시대 중기에 해당되는 거대한 환호(環濠)가 조사된 유적이다. 유적은 남해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한 해발 100m 정도의 독립구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1997년 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유적의 성격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 청동기시대의 환호(環濠)와 취락, 그리고 소규모 패총(貝塚), 둘째, 원삼국시대의 취락과 소규모 도랑(溝), 폐기장과 패총, 셋째, 중세와 근세의 건물지와 구덩이, 도랑(溝) 등이다.

청동기시대의 취락은 일반취락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를 보인다. 집터는 서남쪽 사면에 몰려 있고 남은 공간에서는 집자리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구릉 정상부에서 한 칸의 지상건물지 외에는 일체의 주거시설이나 저장혈 등이 발견되지 않아 취락의 중심부는 광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거지는 평면형태에 따라 원형·장방형·방형으로 나뉜다.

원형주거지는 이른바 송국리식 주거지(松菊里式住居址)로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양단에 매우 깊은 기둥구멍을 배치한 형태이다.

장방형주거지는 규모가 비교적 큰 편에 속해 제58호 집터는 길이 8m 정도 된다. 이 장방형 주거지는 집터 안에 한두개씩의 노지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화재에 의해 폐기된 상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유물이 많이 출토된다. 특히, 제58호 집터에서는 직경 40㎝ 정도의 깊은 구덩이를 파서 큰 저장용 항아리를 묻은 시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방형주거지는 한변이 4m 미만인 소형에 속하는 편이고 노지는 갖췄지만 그 외 특별한 시설이나 기둥구멍이 없이 발견된다.

장방형이나 방형주거지에는 배수시설로 추측되는 벽도랑이 주거지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간다. 이것은 원형주거지에는 보이지 않는 시설이다. 그 밖에 나머지 소형의 타원형 또는 방형수혈들은 저장시설이나 아니면 특수 용도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시설은 도랑이다. 서남쪽 사면에 주거지와 일부 중복되기도 하면서 길이 15m 내외의 도랑이 모두 6줄로 파여 있다. 이 도랑시설은 어떠한 이유에서 굴착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구릉 정상부에는 네 기둥으로 받쳐 올린 지상건물지가 드러났다. 기둥 자체의 직경은 30cm이고, 기둥구멍의 직경은 80cm가 넘는다. 이 건물은 고상창고(高床倉庫)로 해석되기보다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입지한 것으로 미뤄볼 때, 망루일 가능성이 크다.

전체 주거지무리와 저장혈, 도랑 등을 환호가 타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규모가 큰 주환호(主環濠)가 가장 안쪽으로 돌아가고 그 바깥쪽에 규모가 보다 작은 외환호(外環濠)들이 2중 또는 3중으로 돌려져 있다.

주환호는 구릉을 완전히 감싸도록 구축되어 있으나 동쪽으로 뻗은 지맥(支脈)을 향해서는 폭 4m로 열려 있어 환호취락의 출입구로 삼은 것 같다. 환호의 바닥은 입구쪽이 가장 높고 북서쪽으로 가면서 낮아지기 때문에 강우로 침수될 때에는 자연스럽게 북서쪽으로 배수될 수 있도록 하였다.

주환호는 매몰된 토사를 퍼내면서 수 차례 개축된 바 있고, 개축 때마다 바닥의 형태가 달라지고 이동한 흔적이 있다. 주환호의 단면형태는 V자형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바닥의 단면은 각 지점에 따라 또는 재굴착 때마다 달라진다.

즉, 넓거나 좁은 凹자형, 반원형, V자형 등 다양하다.

환호의 규모를 보면, 상부 폭이 가장 넓은 지점이 10m, 가장 좁은 지점이 3.6m이며, 깊이는 안쪽벽이 꺾이는 지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가장 깊은 곳이 4.2m, 가장 얕은 곳이 1.8m 정도 된다.

주환호는 기능이 상실됨에 따라 토기와 석기, 동물의 유해와 패각 등이 고의로 폐기되면서 매립되었다. 주환호의 현존 장축은 70여 m, 단축은 40여 m 조사된 환호의 전체 길이는 200여 m이다.

외환호는 주환호와 함께 북쪽 사면에는 3중으로, 나머지 구간에는 2중으로 돌려져 있다. 매립시기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두 주환호보다 나중에 축조되었다.

원래 자연지형상으로 구릉의 동쪽 사면과 서쪽 사면에는 계곡이 있어 장고모양으로 잘록하기 때문에 환호의 형태 자체도 약간 휘어지지만, 이 곳은 환호 굴착 때 나온 토량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성토되어 있다. 이는 지형 자체를 보강할 목적이지 토루와 같은 시설물은 아니다.

환호 밖으로 남서 사면에 소규모 폐기장구덩이 1개소, 동쪽 사면에는 소규모 패총 1개소가 있고, 취락 중심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서 또 하나의 패총이 형성되어 있다.

취락과 동시기에 형성된 두 군데의 패총 중에서 동쪽 사면의 것은 작은 구덩이에 불과하지만 취락과 약 50m 정도 거리를 둔 패총은 상당한 면적을 차지한다. 당시 취락민들이 많은 양의 쓰레기는 상당한 거리 밖에 폐기했음을 말해 준다.

청동기시대 유물로 무문토기와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대부분이 환호에 폐기된 유물들이다. 무문토기는 저장용 항아리와 독, 바리 등이 대부분이고 붉은간토기계통의 작은 단지와 대각달린 토기들이 꽤 많이 출토되었다.

석기 중에는 농경 또는 벌목 및 목재가공용 도구들이 주종을 이룬다. 반월형석도, 석겸, 석부, 석착, 주상석부, 갈돌과 갈판, 숫돌 등이 많이 출토되고, 마제석검이나 돌화살촉 같은 무기형 석기들도 다량으로 나왔다. 이들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의 취락은 청동기시대 중기의 이른 단계에 해당될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기시대 취락은 집터와 취락의 여러 시설물 폐기장 등이 함께 나온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목을 끄는 것은 거대한 규모로 축조된 환호시설이다.

남산 유적의 환호는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어떤 환호보다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필요했을 것이므로 당시 남산취락에 거주하던 인구수로는 축조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주변 일대의 취락들로부터 노동력이 대거 징발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4, 5채의 주거지가 있는 취락을 거대한 환호로 둘러싼 점으로 볼 때, 남산 청동기시대 유적은 일상적인 취락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다른 유적에서 볼 수 없는 망루가 축조된 점, 유적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평평한 구릉 정상부를 광장으로 남겨둔 점, 붉은간토기와 마제석검과 같은 의례용 물품이 다량으로 제작되고 소비된 점은 남산취락이 당시 취락공동체들 사이에 일종의 중심적인 기능을 했던 취락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울러 주위에 초대형 제단을 가진 덕천리(德川里) 지석묘와 내동 지석묘, 상남동 지석묘 등이 있어 당시 청동기시대 사회의 재구성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원삼국시대의 취락은 청동기시대와는 달리, 구릉 정상부에 형성되어 있다. 구릉 정상부가 후대의 의도적 삭평이나 채토작업으로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일부 주거지는 그대로 잔존한다.

남산 유적의 원삼국시대 취락은 입지의 유형을 고려한다면 특별한 점이 있다. 우선 해발 100m나 되는 구릉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농경지나 수원(水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좁은 공간에 집터들이 밀집되어 있는 양상이다.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서기 3세기대라는 한정된 시기동안 점유되었던 취락이다. 이 시기의 취락들이 주로 고지(高地)에 자리잡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원삼국시대 대표적인 취락이라고 할 수 있다.

원삼국시대 취락에도 환호와 비슷한 시설이 있다. 구릉을 감싸듯이 청동기시대 환호와 거의 동일한 방향으로 원삼국시대 취락의 일부를 두른 도랑이 남쪽 구간에서 ㄴ자모양으로 확인되었다.

이 도랑 밖으로 남쪽 사면과 동남 사면의 급경사지에는 폐기장 구덩이들이 열지어 형성되고 역시 구덩이식 패총도 형성되었다. 또한 서쪽 및 서남쪽 사면에도 정상부에서 폐기한 유물들로 인해 두터운 포함층이 형성되어 있다. 결국, 도랑 안쪽에는 취락이 형성되고 취락 밖으로는 폐기장이 조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원삼국시대 집터는 평면형이 원형 또는 타원형에 속한다. 보통 타원형의 집터가 원형보다 규모가 큰 편이다. 그러나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집터보다는 평면 규모가 작다. 취락 내에서는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규모는 작지만 바닥이 깊고 울퉁불퉁한 타원형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기둥구멍의 배치는 일정한 유형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남산 원삼국시대 취락 유적의 주거지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점토로 된 화덕과 굴뚝 그리고 그와 관련된 온돌 비슷한 난방시설이 있는 점이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짧은 기간동안 주거지의 심한 상호중복 현상이다. 당시 움집의 평균 사용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며 좁은 취락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삼국시대 패총은 여러 차례에 걸쳐 폐기장 구덩이가 인위적으로 굴착되고 폐기물로 매립되는 과정이 반복됨으로써 형성되었다.

이들 폐기장 구덩들 중에는 패각과 유물만이 폐기된 것도 있지만 유물이나 패각이 전혀 없이 유기물만으로 채워진 것도 있다. 매립이 완료되면 페기물을 소각하고 삭평하거나 구덩이를 재굴착하게 된다.

패총에서 출토된 패류 중에는 참굴의 비율이 가장 높고, 비뿔이고둥이나 가무락조개와 반지락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 동물유존체로서 육상포유류는 사슴과 닭이 많고 어류는 참돔과 흑돔의 비율이 높다.

출토유물 중에는 토기가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적색토기 옹이나 바리, 고배, 완의 비율이 높다. 연질·경질도기류는 소량이지만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사한 것이 많다. 회색연질의 노형토기, 격자문단경호, 회청색 경질의 단경호와 완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류는 물론 집터 안에서 출토된 것과 꼭 같다. 토기형식으로 보아, 원삼국시대 취락의 연대는 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골각기로는 사슴뿔로 제작된 칼자루가 압도적으로 많고, 견갑골로 제작된 복골도 많이 출토된 편이다. 일상용품으로는 골촉(骨鏃), 골침(骨針) 등이 있고 각종 짐승이빨로 만든 치레걸이도 많이 나왔다.

집필자
이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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