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응언은 대한제국기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83년(고종 20)에 태어나 1915년에 사망했다. 채응원(蔡應元), 채응경(蔡應慶), 채도석(蔡道錫) 등의 이름도 사용하였다. 1907년 유인석 계열의 서태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정비하여 항일전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해도와 강원도, 함경남도 등지에서 일제의 군경과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의병 탄압작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채응언(蔡應彦)은 1907~1915년간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15년 피체되어 순국할 때까지 항일전을 벌인 대한제국 마지막 의병장으로 평가된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채응원(蔡應元), 채응경(蔡應慶), 채도석(蔡道錫)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출신 가계와 유년기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출생지는 함경남도 안변군 영풍사(永豊社), 함경남도 고원군 산곡면(山谷面), 강원도 통천군 자산(慈山), 평안남도 순천(順川) 등으로 자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피체 후 작성된 판결문에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능중면(陵中面) 고익리(高益里)로 주소가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실제 출신지는 평안남도 성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에 대해서도 해산 군인으로 부교(副校) 출신이라는 설과, 빈농 출신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적 농민’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1907년 음력 7월경 유인석 계열의 서태순(徐泰順)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다가 의병장이 전사하자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1908년 봄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새롭게 정비하여 진동본진분파대장(鎭東本陣分派大將) 명의로 그 해 5월 「보국창의문(輔國倡義文)」을 발표하였다.
독자적 부대로 편성하여 시작한 항일전은 1908년에 들어와 황해도 안평(安平) 순사주재소 공격과 수안(遂安) 헌병분견소 습격으로 이어졌다. 이들 전투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다수의 근대식 총기를 노획함으로써 전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일제 군경의 파상적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서도 항일전을 지속하여 1909년 8~11월 강원도 이천군 방장면(方丈面) 구당리(龜糖里), 황해도 곡산군 이화동(梨花洞), 함경남도 안변군 영풍사 대송동(大松洞) 등지에서 일제 군경, 헌병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이후 극도로 고단한 형세하에서도 강원도 이천, 함경남도 안변, 평안남도 성천, 황해도 곡산 등 한반도 중북부 일대를 무대로 항일전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갔다. 또 활동 지역 곳곳에서 전주를 넘어뜨리는 등 통신시설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항일전 수행 과정에서는 일제 군경의 탄압 강도에 상응하여 진동창의장(鎭東倡義將)으로 불리던 강두필(康斗弼), 또는 강천돌(姜千突) 등 인근에서 활동하던 여러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항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 일제 군경의 탄압이 한층 강화되자, 탄압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단위 부대를 10~15명 규모의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일합방 직후에 벌인 특기할 항일전으로는 1910년 9월 강원도 이천군 광북수비대를 공격한 것과 1913년 6월 곡산군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헌병과 보조원을 처단한 전투가 있다. 그리고 1914년에는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원 읍내에 출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황해도 곡산군의 백년산(百年山)을 중요 근거지로 삼고, 황해도, 함경남도, 강원도, 평안남도 접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한국을 병탄한 이후에도 이처럼 활동이 오래도록 끊이지 않자 일제는 1914년에 들어와 대대적인 의병 탄압작전을 벌였다. 1914년 9월부터 평양헌병대 중좌 오하시[大橋] 헌병대장 직속으로 1개 수색반을 헌병 상등병 1명, 보조원 4명으로 편성하여 5개 수색반으로 운용한 것이 그것이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280원이라는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거는 등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15년 7월 5일 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靈泉面) 처인리(處仁里)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성천분대(成川分隊) 요파출장소(了坡出張所) 헌병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체포 직후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감옥에 투옥되었다.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살인 · 강도죄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0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된 뒤 11월 4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