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례 ()

유교
의례·행사
조선시대에 상왕, 대비 ·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 왕세제 · 왕세제빈 · 왕세손 · 왕세손빈, 부마 등을 책봉하던 국가의례.
정의
조선시대에 상왕, 대비 ·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 왕세제 · 왕세제빈 · 왕세손 · 왕세손빈, 부마 등을 책봉하던 국가의례.
개설

‘책례’는 문자상으로 책봉에 따르는 의례를 뜻한다. 현존하는 책례도감의궤에 의거해 볼 때, 조선시대에 책봉을 거행하는 일반적인 경우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왕세자나 왕세손을 책봉하여 왕의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책봉하는 경우인데, 왕세자나 왕세손에게 배우자가 있을 경우 왕세자빈이나 왕세손빈의 책례도 함께 거행되며, 다른 하나는 가례와 함께 왕비(왕세자빈)를 책봉하는 경우이며, 나머지 또 다른 하나는 선왕의 부묘례(祔廟禮) 뒤에 왕의 즉위 이후 그 동안 미루어 두었던 세자빈을 왕비로, 왕비를 대비로 올려 책봉을 거행하는 경우이다. 책봉은 국왕의 전교나, 예조의 계청(啓請)에 의해 대신들의 의견을 수합하는 과정을 거쳐 결정되지만, 왕세자나 왕세손의 책봉은 국왕의 결단이 결정적이며, 왕비·대비의 책봉은 전례에 따라 으레 이루어진다.

책례의 절차는 국왕이 종친과 문무백관을 전정(殿庭)에 모아 놓고 책립(冊立)의 전교를 선포함으로써 시작하여, 그에 따른 중요 의물(儀物)들, 다시 말해 교명(敎命)·책(冊)·보(寶) 세 가지 의물을 왕세자나 왕비(대비)가 된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교명은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오색 비단 위에 쓰여져 있고, 화려한 문양에 의해 장정된다. 또한 책은 교명문과 주제상 큰 차이 없이 책임의 막중함과 의무를 명시하고 있는데, 왕비(대비)를 책봉할 때는 옥책을 쓰고, 왕세자나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는 죽책을 써서 재질의 차이를 통해 신분의 차별을 드러낸다. 보 역시 핵심 의물로서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서 왕비(대비)인 경우에는 옥보를, 옥인은 왕세자·왕세자빈을 책봉하는 경우에 사용하였다. 이 의물들이 건네지는 방식에서 의식 절차의 차이를 보일 뿐더러 이후에 치러지는 의식도 달랐다.

이러한 중대하고 대규모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행정 주무 관청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으므로, 이를 위해 여러 관청들의 상위에서 총괄적으로 주관하는 별도의 임시 기구를 두어, 의식절차 전체를 총괄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상위의 기구를 일시적으로 두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임시 기구가 바로 책례도감이다. 책례도감은 도감을 운영하는 규칙인 사목을 별도로 마련하여 거행하였고 의례에 필요한 의물을 제작하는 하부 기구뿐 아니라 책례가 끝난 뒤에 책례도감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문서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이후 유사한 책례가 발생하는 경우 참고 자료로 삼을 수 있는 의궤의 제작에도 관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책봉은 중국 주대에 시행되던 봉건제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친친(親親)의 원리에 따라 신분의 고하를 차등 있게 부여하여 연대를 꾀하던 제도로서, 이것에 의해 통치 지역을 분할하였다. 주대의 봉작제도는 기내 제후(畿內諸侯)를 대상으로 하는 내작(內爵)과, 기외 제후(畿外諸侯)를 대상으로 하는 오등작(五等爵)이 있었지만, 황제 체제로 변모된 진한 시대에 들어 기외 제후를 대상으로 하던 오등작제는 중국 주변의 국가 통치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공·책봉 체제로 변모하는 한편, 내작은 왕실 성원과 공신을 대상으로 한 책봉으로 분화되었다.

조선의 책봉제는 당송의 제도를 참조하면서도, 당시 명나라의 율령인 대명률의 의친(議親)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봉작의 대상자에게는 형사상의 특혜가 주어졌다. 조선시대의 책봉제도는 조선 성종 대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종합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책례는 오례 중 가례(嘉禮)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건국 직후 태조 이성계가 4대 조상을 왕과 왕비로 추숭한 것이 최초의 왕실 책봉이다. 이후 수많은 책례가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는데, 책례도감을 통해 책례를 시행한 것을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책례는 대한제국기까지 지속되다가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행사내용

왕실 책봉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왕비를 책봉하는 경우와 왕세자를 책봉하는 경우이다. 다시 왕비를 책봉하는 예는 대체로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가례를 통해 왕비로 책봉되는 경우, 세자빈이 선왕의 부묘례가 끝난 이후 왕비에 책봉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로의 차이에 따라 의례상의 차이가 있다.

먼저 길일을 택해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 책봉 사실을 고한다. 책례가 거행되는 장소는 전정(殿庭)이다. 길시(吉時)가 정해진 뒤에는 종친(宗親)·문무백관(文武百官)이 조복을 차려 있고 전정에 모여서 문관은 동쪽에, 무반과 종친은 서쪽에 섬으로써 시작한다.

이어지는 왕비 책봉 절차는 다음 네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국왕의 전교에 의해 책립을 선포하고 교명·책·보 세 가지 의물을 하사하는 의식이다. 국왕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전에 나아가서 어좌에 오르면, 사배례 의식을 치르고, 교명안(敎命案)·책안(冊案)·보안(寶案)을 차례로 배치한 뒤, 전교관(傳敎官)이 “모씨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는다.”고 하고 전교를 선포한다. 이후 각 안 위에 있던 교명함과 책함, 인수를 사자(使者)에게 전한다. 둘째는 세 가지 의물을 당사자가 있는 곳으로 옮겨 가는 의식으로 반차도의 대상이 된다. 셋째는 당사자가 있는 곳에 당도한 의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른다. 넷째는 그 뒤에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통해 책봉을 축하하는 의식을 거친다.

한편 왕세자의 책례는 구체적인 의식 절차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이지만, 가장 큰 차이는 왕세자가 세 가지 의물을 국왕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받는다는 점과 아울러, 왕비의 책봉에는 신하들이 축하하는 글인 전문을 바치는 의식으로 거행되는 반면, 왕세자의 경우는 책봉 이후 대비전이나 대왕대비전에게 알현하는 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의의와 평가

왕실 책봉 의례는 조선의 국왕 체제가 갖는 특성을 여실히 보여 준다. 국왕은 왕실의 수장이자 국가의 수반으로서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계승 원리는 왕실의 질서에 속해 있었다. 책례의 구체적인 의식 절차는 국왕과 왕세자, 대비 혹은 관료들의 상징성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관계가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2002)
『장서각 소장 등록 해제』(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2002)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1~8(서울대학교 도서관 편, 1978)
「조선 왕비와 명 황후의 책봉 의례 비교 연구」(신명호, 『동북아 문화연구』 33, 2012)
「조선 초기 왕실 편제에 관한 연구─‘의친제’의 정착을 중심으로」(신명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집필자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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