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통 철학에서 천경, 즉 하늘의 법칙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인경(人經), 즉 인간의 도리와 동일함을 강조하는 데 그 주안점이 있었지 천경 그 자체를 인륜과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 말기의 과학사상가 최한기(崔漢綺)는 하늘,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도리가 전혀 무관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천경과 인경[聖經]을 분명히 구분하고 더 나아가서 그때까지도 불변의 진리로 간주되던 성인의 말씀도 후세에 밝혀진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최한기는 “하늘은 큰 덕(德)을 가지고 말이 없되 그 행사로 경(經)을 삼고 사람은 성덕(聖德)을 가지고 입언(立言)하되 윤상(倫常)으로 경을 삼는다. 무언(無言)의 것을 잘 형용한 것이 천도(天道)이고 물리(物理)를 명백하게 나타낸 것이 인도(人道)이다.”고 하여 천경이라는 것은 하늘의 운행 그 자체로 성인이 세운 규범인 인경과는 구분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최한기는 이 하늘의 말없는 운행을 밝히는 학문은 역산(曆算)과 물리(物理)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역산과 물리의 학문은 경험의 축적됨에 따라 후대로 갈수록 점차 밝아지는데 반해 복희(伏羲)/요(堯)/순(舜)/주공(周公)/공자 등의 성지(聖智)에 바탕한 인경(常道와 中道)은 후세에 도로 어두워졌다는 나름대로의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후세에 더욱 밝아진 역산물리의 학(學)으로 옛날의 중도와 상도를 회복해 천지인물의 경을 서로 참고, 발명하면 한갓 지금이 옛날을 말미암아 밝아질 뿐만 아니라 또한 옛날도 지금을 말미암아 더욱 밝아진다.”고 결론지으면서 당시의 새로운 학문이던 역산물리의 학과 전통적인 유교윤리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최한기는 성인이 제정한 윤리 규범도 본래 이 천경 가운데서 뽑아 편질(篇帙)을 이룬 것이므로 만약 이 뽑아낸 편질 가운데 참고할 바가 없는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온전한 천경에 고증해야 하고, 천경과 인경에 모두 보이되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는 사람의 추측(推測)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천경이 보다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천경과 인경의 분리를 분명히 하면서도 그 양면을 인정하는 최한기의 태도에서 우리는 이후 개화사상에서 본격화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