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각(寶文閣)보다는 약 10개월 뒤인 1117년(예종 12) 6월에 세워진 건물로서,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보문각에서 우리나라 열성의 유물을 간직, 강(講)·저술·수교(讎校)·주해(註解)·자료분송(資料分送)하여 조인(雕印)하고 반사(頒賜)한 데 반하여, 이곳에서는 주로 외교에 필요한 자료를 전시, 모화사상(慕華思想)을 고취시킨 듯하다.
예종은 특히 숭유친송책이 강하였다고 하는데, 김연(金緣)의『청연각기(淸讌閣記)』에도 송나라 휘종(徽宗)의 어제(御製)·조칙(詔勅)·서화를 정성스럽게 받들고 게양하여 훈계로 삼아 반드시 엄숙하게 배례한 뒤 우러러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소장품은 1126년(인조 4)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