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3월 10일 ·11일 ·18일에 전개된 철원읍 만세운동, 3월 12일갈말면 만세운동, 4월 8일내문면 만세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최병훈(崔炳勳)은 이웃 평강(平康) 천도교 대교구로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가져와 철원의 천도교인에게 전해 주었다. 천도교인들은 곧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 11명 전원이 붙잡히면서 일단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뒤 기독교측에서 청년단원과 각 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3월 7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청년단측에서 서울의 정황을 살핀 뒤 전개하자고 주장하여 10일로 연기되었다. 3월 10일 박연서(朴淵瑞)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농업학교(鐵原農業學校) · 보통학교 학생들과 교회 · 지방청년 등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추진되었다.
철원군청에서 합류한 뒤, 시위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나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헌병대로 몰려가 전날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오후 4시경 군청으로 몰려가 일본인 서무주임과 직원들을 위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고, 또 윤태항(尹泰恒) 집으로 도망친 군수를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날 운동이 끝난 뒤에도 200여 명의 청년들은 철원역으로 행진하여, 마침 정차하고 있던 열차 안의 승객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열차 안에 있던 조화벽(趙和璧 : 柳寬順의 올케)을 비롯한 승객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독립연설회를 개최하고,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을 찾아가 협박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3월 18일 이병준(李炳準)이 철원 장날을 이용하여, 수 백명의 천도교인을 주동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갈말면에서는 3월 12일 신성규(申聖奎) · 김칠룡(金七龍) 등이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여 청양주재소와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면장 황희수(黃熙秀)도 대열에 합류하여 새벽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동막리처럼 먼 곳의 주민들은 삼베주머니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와 참여하기도 하였다.
내문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최재명(崔在明) · 재청(在淸) 형제 등 독검리 천도교인이 주동하여 4월 8일에 일어났다. 이때 모인 700여 명의 군중은 북창리의 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석교리 헌병파견대에서 헌병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자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