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 사적비 ( )

목차
관련 정보
안성 청룡사 사적비 정측면
안성 청룡사 사적비 정측면
건축
유적
문화재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건립된 청룡사 관련 금석각. 사적비. 시도유형문화재.
목차
정의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건립된 청룡사 관련 금석각. 사적비.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비좌의 높이 31㎝, 가로 134㎝, 세로 86㎝, 빗몸돌의 높이 189㎝, 너비 73㎝, 두께 30.7㎝, 옥개 높이 50㎝. 198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제는 ‘조선국 경기도안성 서운산청룡사 중수사적비(朝鮮國京畿道安城瑞雲山靑龍寺重修事蹟碑)’이다.

직사각형 비좌(碑座) 위에 세운 빗돌과 그 위에 덮은 옥개석으로 구성되었다. 빗돌은 화강암이어서 매우 단단하나 마멸되어 글씨를 판독할 수 없는 곳이 여러 군데이다. 비명과 서문은 동현거사(洞玄居士) 나준(羅浚)이 짓고, 전 직산현감 황하민(黃夏民)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사헌부 지평 김진상(金鎭商)이 썼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양(碑陽 : 비의 앞면)은 서와 명(銘)으로 되어 있는데, 서문의 내용은 고려 말기 지정 연간(至正年間 : 1341∼1367)에 나옹(懶翁)이 중창한 사실과 1720년(숙종 46)에 도인(道人)이 중수한 내용 등 연혁을 차례로 서술하고, 덧붙여서 세조가 토지와 절의 기물(器物)을 하사한 일,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원당(願堂)으로 삼고 절을 보호한 일 등을 적었다.

비명의 내용은 서문과 대동소이하며 다만 맨 끝에 “서방정토에 들어가는 사람은 공(空)과 유(有)를 분별치 않으나, 오로지 비석을 공문(空門) 앞에 세워 후세에게 공렬(功烈)을 전하려는 것”이라고 비석을 세운 이유를 밝히고 있는 점이 다르다.

비명 끝에는 ‘英烈殿下卽位之四十七年庚子七月日立(영렬전하 즉위지47년 경자7월일입)’이라고 건립 시기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1720년(숙종 46)을 가리킨다.

비음[碑陰 : 비의 뒷면]에는 서문을 쓰고 이어서 산중대덕(山中大德)과 시주의 방명록을 기록하였다. 서문에서는 청룡사의 연혁을 간략히 정리하였는데, 원나라 세조 지원연간[至元年間 : 1264∼1294]에 대장암(大藏庵)으로 창건되었고 지정 연간에 중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방명록의 체재를 보면 노덕질(老德秩) · 불량답시주질(佛粮畓施主秩) · 철물대시주(鐵物大施主) · 연화질(緣化秩)로 되어 있다.

노덕질에는 산중대덕과 지전(持殿) · 지사(持寺) · 삼강(三綱) · 주지(住持) · 화사(化士) 등의 직책을 가진 승려 13명이 기록되어 있고, 불량답시주질에는 승속(僧俗)을 합하여 64명, 철물대시주에는 승속을 합하여 17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끝으로 연화질에는 석수 · 편수 · 각공 · 각수 · 조역 등이 8명, 공양주가 4명 합하여 12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방명록은 1720년을 전후한 청룡사의 중수 불사에 참여하였던 승려와 일반 불자의 명단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8세기 초의 불교사원 건축공사의 성격을 살피는 데도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기내사원지』(경기도, 1988)
집필자
이강근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