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전 박장군 묘 출토 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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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전 박장군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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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전(傳) 박장군(朴將軍) 묘에서 출토된 유물 33점.
정의
1980년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전(傳) 박장군(朴將軍) 묘에서 출토된 유물 33점.
개설

198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노계산의 대청댐 수몰지역 내에 있던 전(傳) 박장군 묘에서 출토된 33점 일괄유물로 1981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장군 묘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묘에서 출토된 것이므로 연대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출토유물의 형태와 옷감·무늬 등으로 추정하여 볼 때 임진왜란 후 17세기 전기의 유물로 판단된다.

출토된 유물은 단령(團領) 1점, 중치막(中致莫) 2점, 장옷[長衣] 2점, 방령의(方領衣) 1점, 도포(道袍) 1점, 과두(裹肚) 1점, 저고리[赤古里] 12점, 바지[袴] 2점, 치마[赤亇] 3점, 족두리 1점, 모자(帽子) 2점이다. 그 외에 천금(天衾)류 2점, 멱목(幎目) 1점, 악수(幄手) 1점, 치관제구 등 모두 33점이다. 또한 쌍상투도 수습되었다.

내용

단령은 조선시대 백관(百官)들의 관복(官服)으로, 깃이 둥근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전 박장군 묘에서는 ‘소색삼베관복’으로 지정된 홑단령이 1점 출토되었는데 재조사 결과, ‘무명 홑단령’으로 판정되었다. 뒷길이 123㎝, 뒷품 52㎝, 화장 119㎝로, 양 옆에 사다리꼴의 큰 무가 달려 있다. 17세기 초 홍가신(洪可臣:1541∼1615) 등의 초상화에서 확인되는, 끝이 뾰족하게 올라가는 형태의 무였을 것이다. 소매는 착수(窄袖)에서 광수(廣袖)로 변화하는 중간 단계의 형태이다.

도포는 1점 출토되었다. ‘무명 홑도포’인데 총길이 119㎝, 화장 100㎝, 품 49㎝이다. 도포의 구성 양식으로 판단할 때 17세기 전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방령의는 1점 출토되었다. 본래 ‘소색무명구의’로 지정되었으나 재조사 과정에서 ‘무명 겹방령의’로 명칭을 수정하였다. 겉감은 소색 무명이고 안은 겉보다 거친 무명이다. 목판깃에 섶이 달려 있고 섶에 달린 3쌍의 매듭단추로 앞을 여밀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앞길이 98㎝, 뒷길이 60㎝로 전장후단형(前長後短形)이다. 품은 55㎝이고 화장은 65㎝로 짧은 편이다.

중치막은 2점 출토되었다. 지정 당시 ‘청색무명겹창의’와 ‘소색무명솜창의’로 명명되었던 것이지만 재조사를 통하여 ‘무명겹중치막’으로 수정하였다. 각각의 치수는 길이 110·125㎝, 화장 81·98㎝, 뒷품 44·48㎝이다. 겉섶은 큰 사다리꼴에 작은 삼각형 조각을 붙인 이중섶이다. 좌우 옆선에 삼각형 무가 있으며 옆선에 70㎝의 트임이 있다. 칼깃에 동정은 없으며 길과 소매 일부가 청색으로 물들어져 있는데 원래 청색 옷이 탈색된 것인지 다른 옷에서 이염(移染)이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과두는 1점인데 9㎝의 넓은 간격으로 누벼 만든 ‘명주 누비 과두’이다. 처음에 ‘소색명주누비동방형포’로 지정되었던 옷이다. 총길이가 90㎝로 저고리보다 길고 화장은 96㎝이다. 김덕령 장군(1567∼1596) 묘 등, 16세기의 묘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장옷은 2점이다. 처음에는 ‘아청색무명겹유직령포’, ‘농갈색무명직령포’로 지정되었다. 목판깃이 좌우 대칭으로 섶쪽으로 들여 달렸으며 겉섶과 안섶이 모두 두 조각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장옷의 구조이다. 청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유물은 ‘청색 무명 솜장옷’으로, 변색되어 정확한 색명을 모르는 것은 ‘무명 솜장옷’으로 수정하였다. ‘청색 무명 솜장옷’은 소매의 절반이 작은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것이 특색이다. 짙은 갈색으로 변한 무명 장옷은 재보수를 통하여 원형으로 복원되었는데 뒷길이 118㎝, 화장 85㎝, 품 46㎝이다.

저고리는 13점이 출토되었다. 무명적삼 1점을 제외한 12점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소재별로는 화문단(花紋緞) 3점, 명주 6점, 무명 4점이다. 남녀 저고리가 혼합되었으며 형태도 다양하다.

(1)길이가 길고 옆이 트인 장저고리(長赤古里)는 3점이 있다. 모두 화문단으로 만들었으며 10㎝ 너비의 목판깃이 달렸다. 저고리의 길이는 65∼66㎝이다. 겨드랑이 아래에 ‘ㄱ자형 무’가 달렸으며 옆선에 27∼29㎝의 트임이 있다.

(2)옆이 막힌 짧은 저고리 6점은 지정 당시에는 모두 ‘겹유저고리’로 명명되었던 것인데 깃의 종류에 따라 3가지로 분류된다. ①목판당코깃 저고리는 모두 4점으로, 명주로 만들었다. 저고리의 길이는 48∼54㎝이다. 다른 색 깃이 달려 있는 솜저고리는 지정 당시 ‘소색명주누비겹유저고리’로 명명되었던 것인데 ‘명주솜누비저고리’로 수정하였다. 겉은 명주, 안은 소색 무명으로 되어 있으며 4.5㎝ 간격으로 누볐다. 길이 53㎝, 화장 84㎝, 뒷품 50㎝이다. 소매는 진동 28㎝, 수구 23㎝이다. 무는 없으며 좁고 짧은 고름(1.5×17∼18.5㎝)이 달려 있다. 중간 저고리는 끝동만 별색을 대었고 깃은 동일한 색이다. 크기와 형태는 위의 ‘명주솜누비저고리’와 같다. ②목판깃저고리는 2점인데 1점은 무명 솜저고리이고 다른 1점은 ‘명주솜저고리’이다. 지정 당시 ‘남색명주삼수겹유저고리’로 명명하였었던 것이다. 길이 56㎝, 뒷품 54㎝, 화장 95㎝로 옆트임이 없으며 깃의 모양과 고름의 위치를 제외하고는 목판당코깃 저고리와 형태가 유사하다. ③칼깃 저고리는 소색 무명으로 만들었는데 1점은 솜저고리이고 다른 1점은 겹저고리이다. 지정 당시에는 ‘소색명주겹유저고리’ 2점으로 옷감을 잘못 기록하였다. 10㎝ 너비의 칼깃이 달린 ‘소색무명겹저고리’는 길이 52㎝, 화장 84㎝, 품 52㎝이다. 다른 1점의 무명저고리는 등길이 53㎝, 품 59㎝이며 화장은 114㎝로 매우 길어 남자의 ‘한삼’으로 생각되는 홑저고리이다. 일반적으로 한삼은 격식을 갖추어 입을 때의 속저고리로, 소매가 긴 것이 특징이다. 적삼은 속저고리 의미 이외에 하절기용 홑저고리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헌에 기록된 적삼의 옷감이 목면이나 모시 이외에 명주나 화문사 같은 견직물도 있으며 색상도 소색 이외의 여러 색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칼깃이 달린 무명 저고리로 길이가 52㎝이고 화장이 66㎝, 품이 39㎝이다. 수구는 17㎝이며 진동도 19㎝로 좁아서 옆선의 길이가 30㎝나 된다. 옆선에는 8㎝의 트임이 있다. 당시에 칼깃 저고리는 일반적으로 남자의 저고리이지만 이 유물은 길이에 비하여 품과 진동이 매우 좁다.

(3)출토 당시 너무 손상되어 종이로 배접해 놓은 금선단(金線段) 회장저고리가 1점 있다. 뒷길이 51㎝, 화장 68㎝이고 진동과 수구는 모두 28㎝인 통소매이며 목판깃이 달려 있다. 저고리의 길은 토주(吐紬)이고 깃은 연화문단(蓮花紋緞)이며 끝동은 동자문(童子紋) 금선단이다. 이 금선단은 다른 유물들과는 달리 포도무늬 없이 동자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지는 2점이 출토되었다. 지정 당시 ‘청색무명겹유고’로 명명되었던 ‘무명 겹바지’는 허리와 바지부리에 청색이 남아 있다. 마루폭이 크고 큰사폭과 작은사폭의 구별 없이, 대칭 형태로 이루어졌다. 총길이 99㎝, 허리둘레 100㎝이다. 다른 하나는 소색 무명 솜바지인데 밑이 트인 바지이다. 허리는 유실되었다. 총길이 88㎝로 비교적 짧은 편이고 바지부리의 너비가 42㎝로 매우 넓다. 여자용 바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치마는 3점이 출토되었는데 ‘화문단겹치마’ 1점, ‘명주솜누비치마’ 1점, ‘명주솜치마’ 1점이다. 화문단겹치마는 연화만초문단(蓮花蔓草紋緞)으로 만들었다. 허리와 안감이 소실된 상태이다. 길이는 97㎝이고 5폭으로 만들어진 310㎝ 폭의 치마이다. 4.5㎝ 간격의 주름 흔적이 남아 있다. 명주솜누비치마는 명주에 솜을 넣어 4㎝ 간격으로 누볐다. 치마 길이는 86㎝이고 치마폭은 224㎝이다. 명주솜치마도 허리가 유실된 상태인데 치마 길이는 85㎝이고, 주름 간격은 3.5㎝이다.

모자는 3점이 수습되었다. 지정 당시 ‘소색견편직모자’로 지정된 모자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세로 방향의 모자 길이로 가느다란 필라멘트 견사를 고정시킨 후 굵은 푼사를 바늘에 꿰어 모자 형태 그대로 원통 모양으로 돌려가며 평직 느낌으로 엮었는데 높이는 17㎝, 둘레는 50㎝이다. ‘갈색명주감투’로 지정된 명주 소모자는 높이 15㎝의 삼각형 6개를 잇고 아래에 밑단 10㎝의 천을 둘렀다. 높이 25㎝, 둘레 66㎝이다. 속에는 솜을 넣었으며 모자 안쪽에 털가죽이 남아있다. ‘소색명주감투’로 지정된 소모자는 재보수 과정에서 족두리로 밝혀졌다. 앞높이 9㎝, 뒤높이 27㎝이고 중앙에 원형 조각이 있고 그 주변에 각기 모양이 다른 사다리꼴 조각 7장이 연결되어 둘레 94㎝이다. 안에는 솜이 꽉 차 있고 앞쪽이 낮으면서 뒤쪽으로 높아지는 형태가 구례손씨 묘 족두리(국가민속문화재, 1981년 지정)와 같다. 중앙 부위는 완전히 소실된 상태였으나 재보수할 때 유물 원형을 보존해 주기 위해 구례손씨 족두리의 치수를 참고하여 새로이 만들어 부착한 것이다.

이 밖에 홑이불, 천금, 멱목, 세조대(細絛帶), 악수, 상투 등이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 박장군 묘의 유물은 묘주(墓主)가 명확하지 않으나 유물의 종류나 형태를 통하여 17세기 전기의 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묘주의 수염이 반백이었다고 하는데 쌍상투가 수습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당시 남성들의 머리모양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 외에 전장후단의 방령의, 지금의 사폭바지와는 사폭의 구조가 다른 사폭바지, 다양한 깃 모양과 길이를 지닌 저고리류, 포도무늬 없이 동자문만 있는 금선단 등, 다른 묘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유물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2 복식자수편』(문화재청, 2006)
『임란(壬亂) 전후(前後) 출토복식(出土服飾) 및 상례(喪禮)』(충북대학교 박물관,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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