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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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중 겹누비철릭
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중 겹누비철릭
의생활
유물
문화재
1977년 충청북도 청원군 채무이(蔡無易: 1537∼1594)의 둘째 부인인 순천김씨(順天金氏: 1580년대 사망 추정)의 묘를 이장하면서 출토된 유물.
정의
1977년 충청북도 청원군 채무이(蔡無易: 1537∼1594)의 둘째 부인인 순천김씨(順天金氏: 1580년대 사망 추정)의 묘를 이장하면서 출토된 유물.
개설

이 유물들은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7년 봄 청원군 북일면 외남리 금천(쇠내) 석병산에 있는 채무이와 그의 둘째 부인인 순천김씨의 묘를 비행장 건립 공사로 인해 이장하게 되었는데 순천김씨의 묘에서 미라가 된 김씨와 함께 상당량의 의복과 언간(諺簡), 만사(輓詞) 등이 수습되었다.

인천채씨(仁川蔡氏) 세보(世譜)에 의하면 채무이는 1555년(명종 10)에 19세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후 세자익위사대직(世子翊尉司待直)을 지냈으며 64세를 누렸다. 부인 순천김씨의 생몰년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언간 내용으로 보아 김훈(金壎)의 딸로서, 채무이와 혼인하여 1567년(선조1)에 아들 종길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편 채씨보다 일찍 사망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명주솜누비철릭 1점, 모시홑철릭 1점, 무명솜직령 1점, 명주솜회장저고리 2점, 무명겹적삼 1점, 삼베홑적삼 1점, 명주솜누비바지 2점, 그리고 모시홑치마 1점, 명주솜토시 1점 등이 있다. 그 외에 만장 3점, 은장도, 돗자리, 목관, 표주박 등이 각 1점씩 출토되었으며, 185(192)점의 언간이 출토되었다.

내용

철릭[帖裏]은 명주솜누비철릭 1점과 모시홑철릭 1점이 출토되었다. 상의와 치마형 하의가 연결된 철릭은 순천김씨 묘 언간 중에 ‘텰릭’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굴 보고 당시 여자의 묘에서 나왔기 때문에 철릭을 여자 옷으로 분류하는 오류가 있었으나 남자 가족들이 넣어 준 수례지의(襚禮之衣)의 하나로 추정된다. 철릭의 상하 길이 비례는 시대를 판정하는 단서가 되는데, 16세기 후기에는 1:1의 비례로 나타난다. 순천김씨 묘의 철릭들은 16세기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소매는 넓지 않은 통소매이며 상의와 하의의 비례는 거의 1:1.2, 1:1.3 정도로 치마 길이가 상의보다 약간 긴 형태이다. 9㎝ 간격으로 누빈 명주솜누비철릭은 총길이 112㎝(등길이 51㎝), 화장 121.8㎝, 뒷품 75㎝, 치마폭 467.5㎝이다. 깃은 깃 중간을 접어 박은 이중칼깃으로, 너비는 13㎝이다. 깃길이는 129㎝인데 겉깃 끝에서 34㎝ 올라온 지점에 3.6㎝ 너비의 동정을 달았다. 동정의 길이는 72.6㎝이다. 허리에는 0.2㎝의 고운 주름이 잡혀있다. 모시홑철릭은 총길이 111㎝(등길이47㎝), 화장 144㎝, 뒤품 70㎝, 소매길이 104㎝이다. 깃 중간을 접어 박은 아중칼깃으로, 깃너비는 17㎝이며 동정은 없다. 치마 부분은 36.5㎝ 너비의 모시 15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리에는 0.2㎝ 간격의 잔주름이 잡혀 있다. 허리에는 6㎝ 너비의 안단을 대었으며 소매부리와 치마단은 0.3㎝로 접어서 곱게 감쳤다.

직령(直領)은 무명솜직령 1점이 출토되었다. 지정 당시 ‘직령겹두루마기’로 명명되었던 옷이다. 훼손이 심하여 치수 파악이 어려우나 동정이 달린 이중칼깃과 이중섶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겨드랑이 아래에 달린 직사각형의 커다란 무에는 주름의 흔적이 보인다. 이런 증거에 의거하여 직령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남자의 편복포(便服袍)로, 수례지의로 사용된 옷으로 추정된다.

저고리[赤古里]는 2점이 출토되었다. 모두 여자 저고리인데 깃과 끝동, 섶, 겨드랑이 부분의 사다리꼴 무 등에 만자문(卍字紋)의 5매수자직 화문단(花紋緞)의 회장을 댄 솜회장저고리이다. 지정 당시 2점 모두 ‘겹회장저고리’로 명명되었으나 재조사 후 솜이 확인됨에 따라 ‘솜회장저고리’로 변경하였다. 뒷길이는 48㎝이고 화장은 66㎝, 품은 63㎝이다. 깃너비가 12㎝인 목판깃에는 겉깃 끝에서 15.5㎝ 올라와 달린 4.5㎝ 너비의 동정이 있으며 깃은 겉섶과 안섶에 모두 반 쯤 들여 달렸다. 진동과 소매통이 모두 25㎝인 통소매이며 겨드랑이에는 커다란 사다리꼴 무와 작은 사각접음 무가 달려 있는데 1변이 4.5㎝이다. 끝동너비는 12㎝이다. 고름은 1㎝도 안 되는 너비에 길이는 22㎝이다.

적삼(赤衫)은 2점이 출토되었는데, 1점은 ‘무명 겹적삼’이고, 다른 1점은 ‘모시홑적삼’이다. ‘무명겹적삼’은 지정 당시 ‘목면겹저고리’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뒷길이가 49㎝이고 화장은 68㎝인데 크기는 함께 출토된 회장저고리와 거의 같다. 겨드랑이에는 1변 9㎝ 크기의 사각접음 무가 달렸다. 깃너비가 11.5㎝인 목판깃이 겉섶에 반쯤 들여 달렸고 안섶에는 완전히 들여 달렸다. 그리고 가늘고 짧은 명주 고름이 달렸다. 아직까지 적삼에 대한 학계의 개념은 분명하지 않다. 오늘날 적삼은 주로 여름철에 입는 좁은 솔기의 홑저고리를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시대 기록 중에는 ‘홑적삼’ 외에 ‘겹적삼’도 보이며 색상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함께 출토된 언간 중에는 ‘아버지의 겹적삼을 빨아 저고리를 만들어 준다’는 내용이 보이므로 적어도 적삼과 저고리가 구분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다소 간단한 구조의 짧은 상의로 추정된다.

바지[袴]는 밑 트인 명주솜누비바지 1점이 있다. 안감은 무명인데 바지 밑단인 부리 안쪽에는 겉감으로 9㎝ 너비로 안단을 둘렀다. 누비는 3.5∼4㎝ 간격이며 어깨끈과 허리끈은 겹으로 만들었다. 바지 길이는 87㎝이고 부리는 50㎝이며 가랑이 트임 부분에는 1변 13㎝인 무가 달려있다. 허리말기는 길이가 86㎝, 너비가 14㎝이며 허리에 넓은 주름을 잡았다. 옆트임은 세로형으로 길이 10㎝이며 트임의 끝에는 찢김 방지를 위한 삼각 무를 달았는데 그 크기는 1변이 2㎝이다.

치마[赤亇]는 모시홑치마 1점이다. 허리말기(4×96㎝)와 끈(2.5×63㎝)도 홑으로 만들었다. 치마 길이는 91㎝이며 허리에 2㎝ 너비의 주름을 잡았다.

토시[吐手]는 1쌍이 출토되었다. 겉은 고운 명주이고 안은 거친 명주인데 솜을 얇게 두었다. 크기는 52×39㎝로 비교적 큰 편이며 양쪽 부리에 1㎝ 간격으로 곱게 선을 대었다.

언간류는 모두 192매이며 각각 하나의 낱 종이로 되어 있다. 그 중 3매는 한문 간찰이고 189매는 한글 간찰이다. 간찰을 쓴 종이는 닥종이이며 간찰의 크기는 제각기 다르다. 이 간찰들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은 ‘충북1350’번 자료이다. 편지 끝에 ‘을묘구월순뉵이레니별ᄒᆞ뇡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1555년(명종 10)에 해당된다. 아쉽게도 발신자와 수신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 언간 중에는 순천김씨의 친정어머니인 신천강씨(信川康氏)가 쓴 것이 128매로 가장 많다. 이 중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편지는 117매이다. 모두 남편 채무이의 몰년인 1594년 이전에 쓴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순천김씨 언간은 1560년대와 1570년대, 1580년대에 쓰여 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순천김씨는 출토된 복식과 언간은 묘주가 1580년대에 사망한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듯 출토되는 유물은 시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복식 유물은 16세기 후기의 양반가 평상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언간 또한 당시 우리 조상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6세기 생활문화는 물론, 우리말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2 복식자수편(문화재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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