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초기부터 남도수군(南道水郡)에 아산의 하양창(河陽倉), 서산의 영풍창(永豊倉), 부안의 안흥창(安興倉), 임피(臨陂)의 진성창(鎭成倉), 나주의 해릉창(海陵倉), 영광의 부용창(芙蓉倉), 영암의 장흥창(長興倉), 순천의 해룡창(海龍倉), 사천의 통양창(通陽倉), 창원의 석두창(石頭倉) 등 10개 조창(漕倉)과 내륙에 충주의 덕흥창(德興倉), 원주의 흥원창(興元倉) 등 2개 조창과 황해도 장연현에 안란창(安瀾倉)을 두어 수로를 이용하여 세곡을 경창(京倉)으로 날라오도록 하였는데, 정종(靖宗) 때에 각 조창에 필요한 조선의 수를 정하고, 하양·영풍·안흥·진성·해릉·부용·장흥·해룡·통양·석두 등 바다를 통하여 조운을 하는 10개 조창에는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을 각각 6척씩 배정하였다.
초마선의 자세한 구조와 명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때 조운선으로 쓰여지고, 그 명칭도 ‘馬’자 대신에 ‘嗎, 麻, 亇’ 등 글자로 ‘哨嗎船, 哨麻船, 哨亇船’ 등으로 쓰여진 점으로 보아 그 글자에 특별한 뜻은 없는 듯하다.
병조선(兵漕船)이 개발되고, 맹선(猛船)의 제도가 확립되어 조운이 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세조 이후에 초마선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