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성덕왕 때 서역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이 승달산의 지맥인 백운산(白雲山)에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에는 혜통(惠通)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1016년(현종 7) 화재로 인하여 절이 소실되자 백운산 밑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는데, 사찰의 정교함은 호남지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당시 총지마을일대는 모두가 총지사의 사역으로서 승려의 수가 800명, 암자는 9개소, 승방은 200동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은 1810년(순조 10)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다. 당시에 충청도 석성현감을 지낸 임면수(林勉洙)는 총지사 뒤에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승려들이 이에 반대하여 묘에 참나무 말뚝을 박아버렸다. 임면수는 즉시 사찰의 철거를 명하였으나 승려들이 이에 불응하자 절에 불을 질러 폐사로 만들었는데, 승려들의 일부는 분신(焚身)하고 일부는 법천사(法泉寺)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당시까지 이 절은 장성 이남에서 출가하는 사람들의 도승지(度僧地)였다고 하며, 많은 도승(道僧)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법당터에는 주초석(柱礎石) 18개가 가로 90m, 세로 80m의 크기로 서로 연결되어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주위 150여 정보의 산 능성에는 승려들이 다녔던 통로가 있다.
또한, 총지마을 입구에는 7m 간격으로 석장승 2기가 세워져 있는데, 높이 175㎝, 둘레 220㎝이며, 1987년 전라남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석장승은 총지마을을 지키고 잡귀를 막아주는 수문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밖에도 절터에는 금선(金扇), 금으로 만든 바둑판, 금동 자비, 금마(金馬), 청기와 등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으며, 불당골 · 중샘 · 촌전야지 · 중들청기와터 · 낡은 절 · 절안 · 원통암(圓通庵) 등의 지명만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