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영환(永煥). 최양업(崔良業)신부의 아버지이다. 세례명은 프란체스코. 충청남도 홍주 다래골의 새터(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천주교 창설 당시부터 천주교 집안이었으므로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성례(李聖禮)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사촌 누이의 조카딸이었다. 1820년대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난 최경환은 서울의 공덕리(혹은 벙거지골, 낙동)로 이사하여 살다가,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 김성(金城),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 산골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이루면서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맏아들 양업을 모방(Maubant)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1836년(헌종 2)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839년에는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때마침 기해년의 대박해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자 교우들과 상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해 주었다. 그 후 수리산 교우촌에서 신자들을 돌보던 중, 그 해 7월(음력)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4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9월 12일 옥중에서 죽었다.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시성(諡聖)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