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옥 ()

최광옥
최광옥
언어·문자
인물
대한제국기 의주 양실학교 교장, 평양 대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신문화계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9년(고종 16)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출생지
평안남도 중화
정의
대한제국기 의주 양실학교 교장, 평양 대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신문화계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남도 중화(中和) 출신. 아버지는 최윤조(崔允祚)이며, 어머니는 이순문이다. 외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 기독교신자가 되어 1904년 평양 숭실학당(崇實學堂, 중학과정)을 4년 만에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에 건너가 세이소쿠학교(正則學校)에서 영어·수리를 공부하고,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 2년간 수학하면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유명 교수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였다.

1904년 서울에서 일진회(一進會)가 조직될 때 참여하여 기록서기를 맡았으나 그 배후를 알고 탈퇴하였다. 일본에서 수학하던 중 신병으로 귀국한 뒤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에 나섰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종교부 간사로 관계하며 종교교육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또한, 태극학회·서북학회 등 신학문에 열의를 가진 청년들의 모임에 참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 들어가 안창호(安昌浩)·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과 함께 국권수호운동에도 힘을 썼다.

1907년에는 안악면학회(安岳勉學會)라는 장학기구를 조직, 첫 사업으로 일본어책을 번역한 『교육학』과 자신의 저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출판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설립한 평안북도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에서 잠시 교원 및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1909년에는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大成學校)의 제3대교장으로 취임, 약 반년간 근무하다가 건강이 나빠 사임하였다.

그 밖에 민중계몽에 이바지한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에 관여하기도 하고, 배천군수(白川郡守) 전봉훈이 설립한 사범강습소를 맡아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자 신학문의 선각자로서 뛰어난 웅변술을 가지고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 신문화계몽 및 구국운동을 하다가 배천군수의 초청을 받고서 열변을 토하다 악화된 폐병으로 1910년 단상에서 피를 토하고 33세로 요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교육을 통해 나라사랑의 가능성을 제시한 최광옥」(김동길, 『사학연금』21, 1986.1.)
「대한문전고(大韓文典攷)」(김민수, 『인문·사회과학』5, 서울대학교,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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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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