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중화(中和) 출신. 아버지는 최윤조(崔允祚)이며, 어머니는 이순문이다. 외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 기독교신자가 되어 1904년 평양 숭실학당(崇實學堂, 중학과정)을 4년 만에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에 건너가 세이소쿠학교(正則學校)에서 영어·수리를 공부하고,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 2년간 수학하면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유명 교수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였다.
1904년 서울에서 일진회(一進會)가 조직될 때 참여하여 기록서기를 맡았으나 그 배후를 알고 탈퇴하였다. 일본에서 수학하던 중 신병으로 귀국한 뒤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에 나섰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종교부 간사로 관계하며 종교교육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또한, 태극학회·서북학회 등 신학문에 열의를 가진 청년들의 모임에 참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 들어가 안창호(安昌浩)·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과 함께 국권수호운동에도 힘을 썼다.
1907년에는 안악면학회(安岳勉學會)라는 장학기구를 조직, 첫 사업으로 일본어책을 번역한 『교육학』과 자신의 저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출판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설립한 평안북도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에서 잠시 교원 및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1909년에는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大成學校)의 제3대교장으로 취임, 약 반년간 근무하다가 건강이 나빠 사임하였다.
그 밖에 민중계몽에 이바지한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에 관여하기도 하고, 배천군수(白川郡守) 전봉훈이 설립한 사범강습소를 맡아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자 신학문의 선각자로서 뛰어난 웅변술을 가지고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 신문화계몽 및 구국운동을 하다가 배천군수의 초청을 받고서 열변을 토하다 악화된 폐병으로 1910년 단상에서 피를 토하고 33세로 요절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