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全州) 최씨(崔氏)의 시조. 자는 간유(幹儒).
인종(仁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소부주부(小府注簿)가 되고, 의종(毅宗) 때 재상 최윤의(崔允儀)의 천거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되었다. 명종(明宗) 초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으로 내시(內侍)가 되고, 이어 예부낭중 겸 태자문학(禮部郎中兼太子文學)으로 옮겼다. 1172년(명종 2)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경위를 조사하게 되자, 접반사(接伴使)로서 해명을 잘하여 금나라의 사신을 탄복시켰다.
이듬해 내시낭중(內侍郎中)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으로 동북로도지휘사(東北路都指揮使)가 되어 등화(登和) 등 북계의 여러 성을 선유(宣諭: 임금의 유지나 훈유를 백성에게 널리 알려 공포하는 일)하였다.
이어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병마부사(兵馬副使)가 되어 서경을 공격하려고 화주영(和州營)에 들어갔다가 낭장(郎將) 이거(李琚)의 밀통으로 조위총의 장수인 김박승(金朴升)·조관(趙冠)에게 붙잡혀 병마사(兵馬使)인 대장군(大將軍) 이의(李儀)·어사(御使) 지인정(智仁挺)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초서·예서에 능하였고, 최척경(崔陟卿)·최송년(崔松年)과 더불어 완산삼최(完山三崔)로 불렸다.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追贈)되었다가 아들 최보순(崔甫淳)·최보연(崔甫延)이 크게 현달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가증(加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