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언경(彦卿). 최경(崔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유항(崔有恒)이고, 아버지는 최윤명(崔潤明)이며, 어머니는 이의석(李宜碩)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 1527년 이문전시(吏文殿試)에 급제한 뒤 문반으로 직을 옮겼다. 1533년 사간원정원이 되었는데 이 때에 당하관의 각촉부시(刻燭賦試)에서 차석을 하여 왕으로부터 조궁(造弓)을 받았다.
1537년 지평·사간원헌납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간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하고 그 일당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 응교·전한·사인(舍人) 등을 거쳐 1539년 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대사간 등 삼사의 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거쳐 1541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3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었을 때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자 대신에게 찾아가 수척한 몸으로 3년상을 견디어낼 수 없다고 정강이뼈까지 내보이며 사정하여 교체되었는데,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백인걸(白仁傑)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李芑)의 족질로서 대윤(大尹) 일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수산군(隨山君)에 봉하여졌으며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청탁이 공공연히 행하여졌으나 당시 이기가 두려워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