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초 에 사재경 신호위상장군(司宰卿神虎衛上將軍)이 되고, 1174년(명종 4) 중군병마사가 되어 원수 윤인첨(尹鱗瞻) 휘하에 들어가 서경(西京)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1179년 동지추밀원사로서 원사(院使) 이광정(李光挺) 및 부사 문극겸(文克謙)과 함께 의종의 휘삭(諱朔: 별세한 달) 때문에 정월에 행하고 있는 연등회(燃燈會)를 이전에 하던 대로 2월에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듬해에는 팔관회(八關會)에 백관의 과상(果床)과 중금군(中禁軍)의 의식(衣飾)이 화사하여 절제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를 금지하게 하라는 건의를 올려 각각 시행되었다. 1180년 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아니하고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부(中書侍郎平章事太子少傅), 이듬해에 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다.
이 해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조위총의 반란 이후 팔관회·연등회를 시행할 때 서경에 3품관을 보내는 조처에 반대하고 서경의 중요성을 들어 구제대로 재상을 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서경의 팔관회에 참석, 30여 량(輛)에 달하는 뇌물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등 서경인들의 환대를 받았다. 1182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 죽었다. 당시의 집정 정중부(鄭仲夫)를 모해하려 한다는 기두(旗頭) 강실(康實)의 무고를 받는 등 어려움도 있었으나 무인으로서 순탄하게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