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 조부는 영릉참봉(英陵參奉) 최영(崔瀛), 부친은 승지(承旨) 최낙궁(崔樂窮) 이다.
큰 체구에 용모가 뛰어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다음, 당시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있으면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으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1604년 논공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일옹문집』 2권 1책이 있다. 1774년(영조 50)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00년(정조 24) 나주 향인들이 지은 사당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