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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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주머니로 공을 만들어 쌀겨나 털 또는 공기를 넣어 발로 차던 민속놀이.
내용 요약

축국은 가죽 주머니로 공을 만들어 쌀겨나 털 또는 공기를 넣어 발로 차던 민속놀이이다. 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것으로 일명 농주 또는 기구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유신이 춘추공과 축국을 하다가 춘추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렸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시대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중국 황제로부터 유래한 제도로 여겨져 무사의 정신과 체력을 단련하는 연무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처음에는 털이나 겨를 넣어 공을 만들었다. 점차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이 바람을 넣어 차는 기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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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가죽 주머니로 공을 만들어 쌀겨나 털 또는 공기를 넣어 발로 차던 민속놀이.
내용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행해졌는데, 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것으로 일명 농주(弄珠) 또는 기구(氣毬)라고도 불리는 민속놀이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 유신(庾信)춘추공(春秋公)과 축국을 하다가 춘추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춘추공과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다가 고의로 춘추의 군(裙)을 밟아서 옷고름을 찢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이와 같은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어 초기의 운동방식 등을 알 길이 없으나, 일본과 중국의 문헌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유희(遊戱)』 축국조(蹴鞠條)에 “어느 날 법흥사(法興寺) 규수(槻樹) 밑에서 국(鞠:공)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 때 황자(皇子:中大兄)가 공〔鞠〕을 찼더니 장화〔靴〕가 벗겨졌다.”라는 내용이 있고, 또 중국 왕운정(汪雲程)의 『축국도보(蹴鞠圖譜)』를 보면 구체적인 운동방식을 알 수 있다.

한편, 심판에 대해서는 이우(李尤, 50∼130)의 「국역명(鞠域銘)」이라는 시(詩)에 “심판원은 쌍방에 편(偏)치 않는 공평한 심판을 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옛날 축국의 운동방식은 오늘날의 축구와 비슷한 구기(球技)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공차기에 관한 문헌을 살펴보면, 『동국이상국집』 후집 고율시(古律詩)에 “우연히 기구(氣毬)를 보고 생각되는 바 있어 뜻을 붙여 시를 짓되 공에 바람을 넣어 사람들이 모여 차다가 바람이 빠져 사람들이 또 헤어지니 쭈그러진 빈 주머니가 남았다.”고 하였으니, 최초에는 털이나 겨를 가득 넣어 만들었고, 점차 발달하여 오늘날의 공과 같이 바람을 넣어 차는 기구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종실록』세종 7년(1425) 4월 무오(戊午) 병조(兵曹)의 계(啓)에 “삼가 생각건대, 옛날 한나라의 축국, 당나라의 격환(擊丸)은 곧 황제(黃帝) 축국의 주1로서 그 까닭은 모두 놀이를 통하여 습전(習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였고,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당나라 채부(蔡孚) 타구편(打毬篇) 서(序)에 말하기를, ‘타구라는 것은 옛날의 축국이니 황제가 만든 것으로 병세(兵勢)로써 무사를 연무(鍊武)시켜서 유능한 자를 알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축국은 중국 황제의 유제라 하였고, 무사의 정신과 체력을 단련하는 연무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90년(정조 14) 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초학기(初學記)에 말하기를 국(鞠)은, 즉 국〔毬, 球〕 자(字)이니 지금의 축국은 구희(球戱)인 것이다. 옛날에는 털을 묶어 이를 만들었고, 지금은 가죽태(소의 오줌통으로 공을 만든 것)로 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이를 찬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문헌에 의해 점차 발달하여, 조선시대에도 바람을 넣어 오늘날의 공과 비슷한 형태로 사용하였다. 『동국세시기』에는 “연소한 장정이 축국놀이를 한다. 그 축국은 큰 탄환 같은데, 위에는 꿩의 깃을 꽂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서서 다리를 서로 번갈아 가며 계속 차서 떨어지지 아니함을 선기(善技)로 한다.”고 하였다. 혼자 찰 때는 제기를 차듯이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개인의 공차기 기술을 익히는 것이요, 둘이서 찰 때도 마주보고 서서 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번갈아 차는 법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축국을 제기차기라고 하기도 하나 중국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춘장조(春場條)에 “동요(童謠)에 말하기를 겨울이 오면 제기〔踢毽〕를 찬다.”고 하였고, 조선 숙종 3년(1677)의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한겨울 제기차기〔建建子〕하고, ……제기〔○〕 자(字)로 되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기차기는 척건(踢建:○)이라고 하여 따로 있었던 것이 입증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
『무예도보통지』
『세종실록』
『지봉유설』
『동국세시기』
『박통사언해』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日本の遊戱』(小高吉三郎, 1943)
『中國體育史』(笹島恒輔, 1958)
주석
주1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제도. 우리말샘

집필자
나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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