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달천을 끼고 해발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는 충주시의 남서부에 있다.
1992년과 1995년도에 국립충주박물관이 고려시대 석곽묘 20기, 토광묘 7기, 회곽묘 9기, 화장묘 1기 등 모두 37기를 조사하였다. 1993년과 1994년도에는 건국대학교박물관이 횡혈식석실분 등 통일신라시대 고분 9기와 고려시대 토광묘 및 석곽묘 6기를 조사하였다.
충주박물관이 조사한 지역과 건국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한 지역은 구릉을 달리하고 있으나 크게 보면 같은 지역이다. 대부분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묘제는 횡혈식과 횡구식의 석실분이 모두 나타난다. 횡혈식석실은 궁륭식(穹窿式)이 천장부와 동쪽으로 치우진 짧고 좁은 연도를 갖춘 구조이다. 또한 냇돌을 이용한 시상대(屍床臺)가 마련되었다.
남은 유골과 치아의 수량으로 보아 일부는 추가장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석실내의 바닥은 돌을 깔거나 점토에 석회를 섞어 깔았다. 출토유물은 유개합, 병형토기 등 인화문(印花文)토기가 주류이며, 금동·청동제의 이식(耳飾)과 은제·청동제의 팔찌 및 반지 등이 있다. 연대는 대체로 8∼9세기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석곽묘는 규모가 길이 200㎝, 너비 50∼60㎝ 정도이다. 벽의 축조는 할석을 이용했으나, 단벽은 1∼2매의 판석을 이용한 간단한 구조도 있다. 개석은 자연할석과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묘광 바닥을 정지한 다음 숯이나 쇠똥을 깔고 그 위에 관못을 사용한 목관을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쇠똥을 관밑에 깐 예는 가까운 충주 직동(直洞) 고려묘군과 누암리(樓岩里) 고려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충주 일대가 철의 주요 산지라는 점과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고려 전기의 토기와 청자 등이 있다. 또한 개원통보(開元通寶)·상부원보(祥符元寶)·황송통보(皇宋通寶)·희령원보(熙寧元寶)·원풍통보(元豐通寶)·원우통보(元祐通寶) 등의 중국 송대(宋代) 화폐가 부장되어 있어 편년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연대는 토광묘보다는 2∼3세기 빠른 11세기 후반∼12세기 초로 보인다.
고려시대 토광묘와 회곽묘는 고려자기의 퇴화된 형식과 백자기법이 등장하고 있어 13∼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서는 관못이 출토되었다. 숯이나 쇠똥을 바닥에 깔거나 점토와 백회로 바닥과 벽을 바른 것도 있다. 청동합과 청동수저, 유리구슬이 많이 출토되며, 특히 채색칠기(彩色漆器)도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