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세(太歲)·월건(月建)·일진(日辰)을 숫자적으로 따져 새해의 신수(身數)를 보는 데 사용하였으며, ≪주역≫의 음양설에 근거해 있는 반면 오행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나 ≪경도잡기 京都雜記≫ 등에는 오행점(五行占)으로 새해 신수를 본다고 적혀 있으므로 정조 때까지도 이 책으로 신수를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정조 이후에야 하나의 세시풍속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마의상서 麻衣相書≫가 마의태자의 이름을 가탁한 책인 것처럼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 것인지 아니면 친필 저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토정의 시문집인 ≪토정유고 土亭遺稿≫는 숙종 때 그의 현손인 정익(楨翊)이 간행한 것인데 그 안에 실려 있지는 않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행적과 언행으로 보아서 능히 이러한 위서(緯書)를 즐겼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또한, 규장각에 소장된 ≪토정가장결 土亭家藏訣≫은 어느 때 누구에 의하여 편술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시정에 나돌고 있는 ≪송정토정비결 松亭土亭?訣≫과 토정의 관련성 여부도 알아낼 수가 없다.
내용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주역≫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여러 가지 점에서 주역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첫째, ≪주역≫에 있어서는 중괘(重卦)가 64괘인 데 비하여 여기에서는 48괘만이 사용되고 16괘는 쓰이지 않고 있다.
또한, ≪주역≫에서는 한 괘에 본상(本象) 1, 변상(變象) 6, 도합 7상으로 총계 424괘의 상이 문제가 되는 데 비하여 여기에서는 오직 144괘만이 문제가 되어 약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괘상을 가지고 있다. 1978년에 나온 추송학편(秋松鶴編) ≪토정비결≫은 이러한 점을 보완하여 64괘 전부를 망라하고 있다.
둘째, 괘상을 얻는 방법이 판이하여 사주(四柱)의 연월일시 가운데 생시(生時)가 제외되며, 보는 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나이의 수를 놓고 거기에 다시 당년의 태세수(太歲數)를 놓아 8로 제하여 남은 수로 상괘(上卦)를 만든다. 다음에는 당년 생월수를 놓되 달이 크면 30이요, 달이 적으면 29를 놓고 거기에 다시 생월의 월건수(月建數)를 놓은 다음 6으로 제하고 남은 수로 중괘(中卦)를 만든다.
그 다음 생일수를 놓되 초하루면 1을 놓고 30일이면 30을 놓고 거기에 다시 생일의 일진수(日辰數)를 놓고 3으로 제하여 남은 수로 하괘(下卦)를 만든다. 위의 상중하 3괘를 합하여 한 괘상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는 ≪주역≫ 시괘전(蓍卦傳)에 나오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괘사(卦辭)의 내용도 매우 달라서 ≪주역≫이 인간의 수덕(修德)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하여 이 책에서는 길흉화복의 문제가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특색과 더불어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정월부터 12월까지 12개월을 4언3구로 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역≫에서도 십이벽괘(十二?卦)라는 것이 있으나 이는 절후(節候)의 변화를 음양론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다른 내용이다. 이와 같이 괘상·괘사 및 월별 길흉을 말한 총 6,480구를 지니고 있는 이 책은 부귀·화복·구설·여색·가정 등 일개인의 길흉을 중심으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비록, ≪주역≫의 원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144개의 괘로 분류된 유형은 ≪주역≫의 원리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조선 말 민생의 곤궁이 절정에 달하여 일신·일가의 화복만이 일차적 관심사로 등장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해준다고 여겨진다. 이전부터 행하여오던 오행점이나 문복신수(問卜身數 : 몸의 운수를 점침)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고 좀더 세분된 예언을 갈구하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조선 말기의 민심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