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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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 입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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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 입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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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제복과 평복은 구별되어왔다. 제복은 공복 즉 관복을 가리키며, 평복은 관외(官外) 평상복으로 편복을 가리킨다. 편복은 이같은 이중복식구조에서 우리 고유 복식의 형태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옷이라 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편복으로 국제(國制)인 표의(表衣)를 입은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기록된 왕의 연거복(燕居服)으로 미루어 보아 백저포(白紵袍)를 입고 조건(皁巾)을 쓰고 검은 신을 신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온 선비의 예의있는 몸차림은 연거시에도 관을 쓰고 포를 입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편복 의관에는 입제(笠制)와 관제(冠制)·포제·신발류가 있다. 입제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흑립이다.

흑립은 초기의 평량자(平凉子)와 초립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 정립된 조선시대 입제의 정제(定制)라 할 수 있다. 즉, 흔히 갓이라고 불리는 양반계급의 전용물이었다.

평거시에도 갓을 쓰고 사람을 접대하는 것이 예의이기는 하나 거추장스러워 관(冠)이 나타나게 되었다. 관은 집안에서만 착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관에는 정자관(程子冠)·충정관(冲正冠)·동파관(東坡冠) 등이 있었다. 그 중 한말까지 양반들 사이에 가장 많이 착용되었던 것은 정자관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편복 포제로는 답호(褡護)·철릭·직령포·도포·창의(氅衣)·두루마기 등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답호와 철릭이 가장 많이 착용되었고, 직령포도 흔히 입었다. 도포는 조선 중기 1607년(선조 40)에 ‘초록겹도포’라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위관자(爲官者)가 입는 직령 공복과 같게 할 수 없어서 직령 제도를 변경하여 만들었다. 이것은 중치막과 마찬가지로 4폭으로 되어 있으며, 뒤에 전삼(展衫)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말기에는 창의가 가장 많이 착용되었다. 창의는 창옷이라고도 하며, 대창의와 소창의가 있다. 대창의는 광수(廣袖)이고 소창의는 대창의보다 착수(窄袖)이다. 창의는 양옆에 무가 없으며 대창의는 4폭, 소창의는 3폭으로 갈라져 있다. 일반적으로 대창의는 간단한 출입시에 입었고, 소창의는 대창의의 받침옷도 되면서 집안에서 입었다.

이 밖에 덕망이 높은 도사나 학자들은 연거복으로 학창의(鶴氅衣)를 입었는데, 이것은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 하였다. 흰 창의에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검은 헝겊으로 넓게 선을 대었다. 여기에는 흔히 복건을 썼으며, 정자관·동파관·와룡관(臥龍冠)·방건 등을 쓰기도 썼다.

한말 개화기를 맞이하면서부터 두루마기를 주로 착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창의에 무를 가하고 양옆을 막고 소매가 좁아진 형태이다. 신발은 착용자의 지체와 형편에 따라 재료와 정조(精粗)에 차이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피혁제인 태사혜를 가장 많이 신었다. 그 밖에 짚신도 정제품(精製品)일 경우에는 신었다.

참고문헌

『고려도경(高麗圖經)』
『경도잡지(京都雜志)』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우리 복식에 있어서의 편복(便服) 포제(袍制)의 변천에 대하여」(김동욱, 『동방학지』 7,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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