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심도포량미(沁都砲糧米)라고도 한다.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양요로 인해 당시 섭정을 하고 있던 대원군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해안선 방어를 강화하고, 이양선(異樣船) 출몰 등에 대비하여 각 지방 연해안의 군비도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즉, 대원군은 1866년 10월 프랑스함대가 철수하자 수도방어상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강화도에 정2품 아문인 진무영을 설치하고 유수(留守)로 하여금 진무사(鎭撫使)를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통제영에 따르며, 종전 경기수영 관하의 각 진을 이속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진무영의 군대는 외적방어에 가장 적합하다고 인정된 포군(砲軍)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병력수는 약 3,000명에 달하였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는 진(鎭)이나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외적방어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병인·신미양요를 계기로 포대와 화포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면서, 이를 능란하게 다룰 포군양성이 화급한 과제로 떠오르자 이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신미양요를 계기로 포군 1만 6,771명, 총수(銃手) 1,225명을 전국 307개 처에 나누어 배치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토록 하였다. 그런데 갑작스런 군비강화와 군제개편, 특히 포대설치와 포군·총수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었다.
군비를 강화·확충해가던 초기에는 왕실의 내탕금(內帑金) 등으로 충당하였으나 이것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대원군은 군비강화를 위한 재정확보의 일환으로 도문세(都門稅), 심도포량미세, 군포의 호포화(戶布化) 등의 방안을 제정하여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심도포량미세가 바로 포량미를 말하는 것으로, 1871년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강화의 진무영관하의 각 진영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항상 비축해두기 위해 거두는 특별 목적의 국방세였다.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전결(田結)에서 1결당 1두(斗)씩을 징수하는 것으로, 반드시 답주(畓主)가 부담하게 하였으며 1년 수세(收稅)는 약 5만석 가량이었다.
갑오개혁 당시, 중앙군제의 개편과 함께 지방군이 진위대체제로 바뀜에 따라, 이전에 포군 등을 주력으로 하여 외침에 대비하던 지방의 각 진이나 방어영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 각 진과 방어영의 경비조달을 목적으로 하였던 포량미세도 자연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