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때 설치된 군영으로 모두 장번(長番) 급료병(給料兵)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도감병의 운영을 위해 삼수량(三手糧)을 거두었으나, 이것만으로는 5,000여 명의 군병을 유지할 수가 없어 포보·향보(餉保) 등을 설정해 운영 경비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포보의 설정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광해군 연간(1608∼1624)부터 설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 포보가 설정되었고, 초기에는 가포(價布)로서 1년에 포 3필을 거두어 경비에 충당하였다.
그러나 포보가 다른 보인보다 역이 무겁다는 이유로 1662년(현종 3)에 2필로 경감하고 영조 때 균역법이 성립되면서 1필로 감액되었다.
포보의 수는 1662년 당시 1만 9,690여명이었으나 1732년(영조 8)에는 3만 6,82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 때 3만 7,000명으로 수를 제한하였다. 그 뒤『만기요람』에 나타난 구체적인 포보수를 보면, 경기 2,746명, 해서 8,710명, 호서 6,672명, 호남 8,773명, 영남 7,040명, 관동 3,253명 등 3만 7,194명으로 책정되어 있다.
포보 상납은 대개 목(木)·포(布)·전(錢)으로 하되, 그 해 10월 이내에 상납하도록 하였다. 이는 훈련도감의 군색(軍色)이 관장하였는데 포보가 상납한 가포는 대개 도감병의 옷값에 충당되었다.
포보가 상납한 목·포·전의 수는 목 712동(同) 20필, 포 25동, 전 7만 2,160냥이다. 그리고 포 1필이 감해진 뒤의 부족액은 균역청(均役廳)에서 대신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