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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 제작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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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개념
서화에 종이나 비단을 발라 꾸며서 족자 · 액자 · 병풍 등의 형태로 꾸미는 표지장식. 배첩 · 장황.
이칭
이칭
배첩, 장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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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화에 종이나 비단을 발라 꾸며서 족자 · 액자 · 병풍 등의 형태로 꾸미는 표지장식. 배첩 · 장황.
내용

서책(書冊)과 서화첩(書畫帖)의 장정(裝幀)을 포함하여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표구의 영향으로 도배(塗褙)도 이 범주에 들었다.

표구는 일본의 용어 효구(表具)를 그대로 받아온 것이다. 원래는 장황(裝潢)이라 하였다. 또 배첩(褙貼)이라는 말을 썼음이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 공전(工典)의 경공장조(京工匠條)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이를 표구사(表具師)라 하고, 그 영업 장소를 표구점(表具店)이라 부른다.

우리 나라의 표구사들은 신화(新畫)의 표구와 고서화(古書畫)의 복원을 주요 작업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드물게나마 서책의 장정도 다룬다. 표구는 그 형태에 따라 족자·액자 그리고 병풍의 일로 구분된다. 요즈음은 주택이 점차 거의 서구화됨에 따라 주로 액자 모양으로 표구된다.

액자 표구의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비단을 마름질하고 그림의 배접(褙接)에 들어간다. 원래 서화의 크기를 기준하여 세 겹까지 하였지만 대개 두 번에 그친다. 초배(初褙)에는 풀을 고루 먹여 고정시키고 그림을 널어 말리며, 두 번 배접한 다음에 그것을 건조판(乾燥板)에 붙여 말린다.

잘 마른 것을 뜯어내어 조립하고 비단을 붙인다. 그림과 비단 사이에는 금선(金線)을 넣으며, 고화(古畫)의 경우에는 색지(色紙)를 쓴다. 이것을 그 사이 마련해 둔 액자 틀에 올린다.

병풍 표구의 경우에는 여러 폭을 잇기 위하여 돌쩌귀를 단다. 예전에는 삼베로 하였고 좋은 것은 비단으로 하였으나 지금은 광목을 쓴다. 족자 표구의 작업도 그 첫 과정은 액자의 그것과 같아서 비단을 선택하고 재단한다.

그리고 배접지(褙接紙)를 고른다. 초배를 하고는 널어 말리는데, 이때 그림을 펴기 위하여 물비(또는 물솔)나 분무기를 사용하여 그림에만 습기를 준다.

그것이 마르면 겹배에 들어가고 겹배된 것은 그림 면이 안쪽으로 가게 하여 건조판에 붙여 말린다. 그 다음 그것을 뜯어내어 재단해 놓은 비단 등으로 조립한다. 그리고 마지막 배접인 삼배(三褙) 또는 총배(總褙)가 있으며, 이 때 축목(軸木)과 반달도 준비된다.

삼배된 것은 다시 건조판에 붙여 한두 달 말린다. 잘 마른 것을 떼어 내면 거기에 반달과 축목을 붙이며 축머리를 끼어 맞추고 장식과 족자 끈을 달아 완성한다.

고서화 복원 처리는 먼저 그 처리 방법의 결정에서 시작된다. 서화의 재질(材質)·연대·크기·특징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에 알맞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 다음 때를 빼기 위한 재료를 준비한다. 그 실제의 작업은 분해·가배접(假褙接)·세탁 그리고 배접의 네 단계를 거친다.

먼저 물에 담가 두었던 그림을 일판에다 뒤집어 펼쳐 놓고 배접지와 비단 등을 한 겹씩 조심스럽게 분리시킨다. 또 다음 작업 과정에서의 약물 사용 때 그림을 최소한 보호하기 위하여 분해된 그림을 받쳐 주는 가배접을 한다.

세번째 단계에서 간단한 것은 그냥 물세탁만 한다. 따뜻한 물에 담그고 매 시간 물을 갈아준다. 그러나 때를 빼기 위해서 이전에는 잿물을 썼고, 요즈음은 수산(水酸, C2H2O2·2H2O)을 적당히 물에 풀어서 한다. 마지막으로 때가 제거된 그림을 다시 표구한다. 이 과정부터는 신화를 다루는 법과 같다.

우리 나라의 표구사가 사용하는 연장으로는 재단 칼·전판(剪板, 또는 조기)·풀비(또는 귀알)·대칼·일판·건조판 등과 소목공(小木工)이 쓰는 소연장들이 있다. 재단 칼은 소두칼이라고도 불리며 종이와 비단을 자르는 데 쓰이고 잔일에 필요하며 크기가 다른 세 자루가 있다.

조기는 종이와 비단을 자를 때 자의 구실을 한다. 표구사는 대개 두드리기·문지르기·풀칠·세(細)풀칠·물 뿌리기 등의 용도에 맞는, 각기 다른 다섯 종류의 풀비를 필요로 하며, 그 종류마다 각기 두 자루씩 가진다.

대칼은 대나무로 만든 작은 칼인데 건조판에 붙여 말려진 그림을 떼 내거나 족자 또는 액자의 가장자리를 쉽게 접기 위하여 금을 먹일 때 쓰인다. 일판은 풀칠을 위한 풀판이 되기도 한다.

건조판은 배접 처리된 그림을 붙여 두고 말리는 판이다. 전통적인 건조판은 문틀의 나무살에 된풀로 종이를 열 겹 바르고 그 위에 감물을 먹인 것으로 하여 썼다. 요즈음에는 합판을 많이 쓰고 있다. 표구의 재료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비단과 종이와 풀이다.

표구에 사용되는 한지(韓紙)로는 백지(白紙)·창호지·간지(簡紙)·농선지(籠扇紙)·태지(苔紙) 등이 있다. 풀에는 배접에 사용되는 식물성 풀과 액자나 병풍의 틀 제작, 축머리의 부착 등 나무일에 쓰이는 동물성 풀, 즉 아교의 두 종류가 있다.

풀은 그림과 비단과 종이를 결합시키기 위하여 충분한 접착력을 가져야 하나 너무 세어서는 그림이나 족자에 긴장감이 생겨서 안 된다. 제대로 쑨 풀이 아니면 그림에 곰팡이가 슬거나 좀먹을 위험이 따른다. 그밖에 반달·축머리·족자 끈 등은 족자를 꾸미는 데 필요한 재료들이다.

한국 표구는 중국으로부터 받아온 것이다. 우리 나라 표구의 옛 이름은 장황이었다. 장황은 ≪당육전 唐六典≫에 “숭문관의 장황장(裝潢匠)이 다섯 명이고 비서성은 장황 열 명을 두고 있다(崇文館 裝潢匠五人 秘書省 有裝潢十人).”하였으니 그 관계를 알 수 있다.

표구법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 나라에서 독특한 발전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조선조의 도화서(圖畫署)에 있던 배첩장(褙貼匠)이라는 명칭은 ≪대전회통≫에도 언급되어 있어 표구의 전통이 조선 말까지 이어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표구에 관한 문헌이 적고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표구법이 어떻게 전개, 발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다가 경술국치 이후 일본인의 한국 거주가 늘어나면서 일본 표구가 우리 나라에 상륙하였다. 일본 표구사들은 대부분 일본인 서화의 표구일을 담당하였다. 1930년 이전 서울에는 한국인 표구상(表具商)으로 유일하게 수송표구사가 있어 주로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 소장 서화들의 표구일을 맡아 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대부분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면서 표구일을 배웠던 한국인들이 점차 독립하여 표구점을 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일제 말기에 서울에는 한국인 표구점의 수효가 일본인의 그것을 앞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 표구는 일본 표구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 이후 6·25 동란을 겪으면서 우리 나라 표구는 그 재료난에 많이 시달렸으나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한지와 비단의 개발 등으로 해결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오면 경제 면에서의 호황을 타고 골동품 경기가 일었는데, 그와 함께 표구점이 성업을 이루게 되었다.

그와 같은 성업으로 표구점의 수효가 크게 늘어난 반면,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젊은이들이 가게를 열게 됨으로써 표구 기술의 저하를 낳게 되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 이래 이 분야에 종사해 오면서 오랜 경험을 쌓은 표구사들은 우리 나라 표구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런 결과의 하나가 우리 나라 표구의 해외 진출이다.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소재 박당(朴堂)표구사의 김용복(金容福)과 김남두(金南斗)는 서독 함부르크의 민족학박물관(民族學博物館, Hamburgisches Museum fur Volkerkunde)의 초빙으로 1980년 초에서 1981년 중반까지 1년 반 동안 그곳에서 동아시아 그림들을 표구, 복원 처리하였다.

우리 나라 표구 역사의 복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 나라의 전통적 표구법과 표구 양식을 살려내고, 우리 나라 표구가 중국·일본 두 나라의 표구 사이에서 전개하였던 기능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장황(裝潢)-한국에서의 동아시아 그림처리법-」(조흥윤, G.Prunner, 『동방학지』 49, 1986)
Chinese Pictorial Arts as Viewed by the Connoisseur(R.H.van Gulik, 1958)
『○yogu-montierung und Restaurierung ostasiatischer Bilder in Korea』(G.Prunner und Cho Hung-youn, Mitteilungen aus dem Museum fur Volkerkunde Hamburg,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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