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장(樂章) 가운데 속악가사의 하나이다.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한시체로,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에는 한시에 현토한 형태로 수록되어 있는데 각각 자구(字句)상의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정철(鄭澈)의 「성산별곡(星山別曲)」과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등에 이 작품의 명칭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악장으로서뿐 아니라 사대부나 풍류가객에게도 널리 수용되었던 것이 확실시된다.
중국의 송사(宋詞)에도 같은 악조명(樂調名)이 있으나 가사는 상당히 다르다. 즉 『송사』 악지 교방(敎坊) 「태종친제소곡조 太宗親制小曲調」와 남송(南宋)의 오문영(吳文英)이 지은 「풍입송」과 가사가 다른 것으로 보아 고려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악지에는 이 노래가 군신간의 연회(宴會)를 끝내고 부르며 송축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작품의 내용은 요(堯)임금이나 탕왕(湯王)보다 큰 덕을 지니신 임금을 만나 나라가 태평성대임을 노래하고 아울러 임금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축원한다는 것이다.
「풍입송」은 황종 평조(黃鐘平調)이며, 음계는 황(黃)·태(太)·중(仲)·임(林)·남(南)의 5음음계이다. 조선 초기의 작품인 「유황곡(維皇曲)」·「보태평(保太平)」 중의 「융화(隆化)」 등의 바탕이 되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사인(士人) 권모(權某)의 「풍입송」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하고, 선비들이 거문고를 배울 때는 반드시 먼저 「풍입송」을 익히게 되었다는 성종 당시의 풍습이 적혀 있다.
「풍입송」은 조선 중기까지 궁중악(宮中樂)으로서 중용(重用)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 사이에 널리 회자(膾炙)되던 음악이었다. 지금은 전하지 않고, 그 유음(遺音)이 「유황곡」·「융화」 등에 간직되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