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종(啓宗)이라고도 한다. 성은 백씨(白氏). 전라남도 광양 출신. 어릴 때부터 영특한 자질은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학업을 닦지 못하였고, 모필제조업을 시작하여 부모와 두 동생을 보살폈다. 20세가 되던 해에 부모가 모두 죽자 무상(無常)을 느끼고 명산 유람의 길에 올랐다.
어느 날 전라북도 순창 구암사(龜巖寺)에 이르러 당대의 강백(講伯:강원의 강사)인 설두화상(雪竇和尙)을 중심으로 40여 명의 학인(學人)들이 강경(講經)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불갑사(佛岬寺)에 가서 머리를 깎고 득도하였다. 이후 구암사를 비롯하여 영원사(靈源寺) · 벽송사(碧松寺) · 선암사 · 송광사에서 경학을 공부하였고, 다시 구암사 · 운문사(雲門寺) 등의 여러 사찰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몇 해 동안 후학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생사해탈(生死解脫)에 있으며, 경전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해탈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다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여 크게 깨침을 얻었다. 이로부터 부안 내소사(來蘇寺)와 월명사(月明寺) 등으로 자리를 옮기며 선원을 짓고 선풍(禪風)을 일으켰으며, 백양사(白羊寺) 선원으로 옮겨 선실을 증축하였다.
그 뒤 수년 동안 중국과 일본의 명찰을 살피고 귀국하였으며, 만년에는 정읍내장사(內藏寺) 주지에 취임하여 그곳에 선실을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 40여 석을 추수할 만한 농토를 확보하였다.
언제나 수좌(首座:참선 수행하는 승려)들에게 반농반선(半農半禪:농사와 참선을 병행함)할 것을 주창하여, 승려가 무위도식한다는 비난을 듣지 않도록 함으로써, 당대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白丈)의 청규(淸規)를 확립시켰다. 청정과 수행으로써 평생을 살다가 1929년 3월 27일에 제자들과 사중(寺衆)을 불러 『원각경 圓覺經』의 보안장(普眼章)을 독송하게 하고 나이 62세,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