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계명(季明). 한성익(韓聖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배휴(韓配休)이고, 아버지는 한사열(韓師說)이다.
1768년(영조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한림소시(翰林召試)에 합격하여 검열이 되었으나, 국왕의 부름에 즉시 나아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관동 연해에 충군(充軍)되었다가 대간의 구원으로 곧 풀려났다.
1770년 정언으로 대신의 잦은 교체와 예우를 하지 않는 점, 국왕 근신인의 뇌물 성행, 궁중 노비의 횡포, 국용의 탕감과 사치의 성행, 권세가의 토지 침탈, 수령의 불법 행위, 과거 급제자의 증가로 인한 분경(奔競)의 폐단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제거하여 국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고 사슴 가죽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정언으로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교리·제학을 선발하기 위한 제1차 홍문관의 인사기록)에 입록되었으나 입록시 홍문관원이 권점을 추가한 점이 밝혀져 제외되었다. 1780년(정조 4)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 왔다.
또한 부수찬으로 인재와 재용(財用)을 중시할 것, 수령의 신중한 선택, 광범위한 인재 수용, 국가 재용의 절감 등 시무 10조를 올렸다. 1788년 응교로 죄인 처벌을 두고 대신과 갈등을 빚어 관직에서 쫓겨 났다가 이후 양주목사, 대사헌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