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은 바오로. 경기도 양지 추계(秋溪)의 천주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 양친이 사망하여 큰아버지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883년 세례를 받은 뒤 종현 학당에서 공부하다가 1884년 신부가 되기 위하여 정규하(鄭圭夏) 등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를 이겨내지 못하여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같은 해에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건강을 회복한 한기근은 원주 부엉골에 설립된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87년 학교가 용산으로 이전이자 용산에서 학업을 계속한 후 1897년뮈텔(Mutel, G. C. M., 閔德孝)주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신부가 되자마자 예수성심신학교의 교수로 부임했고, 1902년에는 황해도 황주 본당으로 전임되어 1913년 4월까지 황해도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1913년 5월 경향잡지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경향잡지』와 성서활판소를 담당하게 되었고, 1924년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지도신부를 겸하였다. 1925년에는 로마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성직자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의 업적은 한국천주교의 초창기에 많은 신앙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과 몇 권의 저서 간행, 그리고 한글 연구 등이라 할 수 있다. 번역서는 『예수진교사패(耶蘇眞敎四牌)』(1907)·『사사성경(四史聖經)』(1910)·『성분도언행록』(1911)·『종도행전(宗徒行傳)』(1922)·『성체조배(聖體朝拜)』(1923) 등이 있고, 한글 연구와 관련해서는 1910년 성서번역 당시 출판물에 띄어쓰기와 문장기호를 사용하려 한 적이 있으며, 1910년 친필원고인 「우리말 띄어쓰기의 원칙」은 당시 수준으로는 상당한 국문법 연구의 결과로서 이는 유길준(兪吉濬)·주시경(周時經) 등의 문법연구에 비견될 만한 내용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4년 연로한 나이 때문에 경향잡지사를 그만두고, 1939년 봄에는 수녀회 지도 신부도 사임한 뒤 성서활판소 일에만 전념하다가, 1939년 10월 21일 지병이었던 기관지 천식으로 71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