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서(公瑞). 한절(韓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한치원(韓致元)이고, 아버지는 첨정 한운(韓運)이며, 어머니는 이신(李愼)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지평·병조정랑·승문원부응교·의정부검상과 사인 등을 거쳐, 1499년(연산군 5) 봉교로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질정관(質正官)으로 천추사(千秋使)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돈녕부정이 되었다. 연산군의 난정이 심해지자 직언을 자주 하여 왕의 미움을 받아 승진되지 못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1507년(중종 2)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동부승지·도승지·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기근에 허덕이는 도민을 구휼(救恤)하였고, 돌아와서 한성부우윤을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 뒤 이조판서 겸 도총관을 지내고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좌참찬 겸 지춘추관사가 되었으며, 1520년(중종 15)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1522년(중종 17) 지중추부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중국사신을 접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여러 번 벼슬을 사양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로 한거하던 중 죽었다. 품성이 온순하면서 겸손하고 신중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