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0년(광종 1)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高麗史)』권71 악지 속악조(俗樂條)에 오언절구의 한문으로 된 해시(解詩)와 함께 그 내력이 수록되어 있으며, 같은 내용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106 악고(樂考) 17에도 옮겨져 있다.
이에 따르면 이 노래는 거문고 밑바닥에 적혀 중국의 강남(江南)에까지 떠내려갔는데, 그 곳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궁금해하던 중, 광종 때 사신 장진공(張晋公)이 그것을 한시로 풀이하여 주었다고 한다.
한역시는 “달빛 밝은 한송의 밤/물결 가라앉은 경포의 가을/슬프게 울며 오락가락하는/소식 지닌 한마리의 갈매기(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송정 ᄃᆞᆯᄇᆞᆯ근 밤에 경포대에 물결잔제/유신ᄒᆞᆯ 백구는 오락가락 ᄒᆞ건마는/엇디타 우리 왕손은 가고 아니 오ᄂᆞᆫ고.”라는 시조의 초장·중장과 내용에 있어 거의 일치한다.
이 노래의 가사를 중국인이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향찰식 표기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후대에 시조로 변형되어 불렸다는 사실에서 이 노래가 향가 계통의 노래였다는 것과 향가의 삼구육명(三句六名) 형식이 시조에 영향을 주어 시조가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주목된다.